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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왜 죽은지 400년 된 지금까지 계속 위대한가?

[셰익스피어 서거 400년] 셰익스피어 학회 회장 안병대 교수 일문일답 ②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2016-01-17 17:36 송고
16~17세기 영국화가 존 테일러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초상화 ©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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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가 동성애자?여자? 셰익스피어학회에 물어봐"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는 세계문학사에 남긴 위대한 족적만큼이나 작품과 생애를 둘러싸고 갖가지 궁금증을 낳았다. 셰익스피어는 누구인지, 그의 수수께끼 같은 묘비명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은 특히 수백 년간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뉴스1은 올해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아 셰익스피어에 대해 갖고 있는 궁금증을 한국셰익스피어 학회에 물었다. 셰익스피어학회 회장인 안병대 한양여대 영문과 교수가 셰익스피어가 누구인가를 다룬 1편에 이어 이번 2편에도 당시의 연극, 셰익스피어의 묘비명의 의미,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에 대해 설명했다.

안 회장은 "당시의 연극은 하층 노동자로부터 여왕까지 함께 즐긴 당대 최고의 인기 연예산업이었다"면서 "조명시설이 부실한 대신 볼거리인 의상에 특히 신경을 쓴 것이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인간과 인간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 통찰하면서 그것을 적확한 비유와 아름답고 심오한 묘사로 풀어낸 점이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안병대 회장과 이메일로 나눈 일문일답이다.

-셰익스피어 시대 연극은 어떤 식으로 공연됐나. 입장료는 얼마였나.

▶연극은 셰익스피어 시대 가장 영향력있는 대중문화였다. 엘리자베스 여왕(1558∼1603)이 통치하던 시기의 런던은 많은 농촌 인구가 유입되어 대단히 북적거렸지만 동시에 활력도 넘쳤다. 다양한 경제활동과 문화활동이 이뤄진 런던은 셰익스피어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문헌에 따르면 1590년대 중반 런던의 연극 관람객은 매주 약 1만5000명이었다. 이는 당시 런던 인구의 약 10분의 1에 가까운 엄청난 숫자다. 이들이 매주 연극을 봤다는 것은 연극이 당대 최고의 연예산업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576년에 최초로 공공극장인 '시어터'가 문을 열었고 '커튼', '폴', '뉴잉턴 버츠', '로즈' 등의 사설극장들도 성업 중이었다.

당시 연극 입장료는 공공 극장의 경우 마당에서 서서 보는 입석관객은 1페니(약 2200원으로 추정됨), 갤러리의 좌석 관객은 자리에 따라 3~5 페니였으며, 블랙프라이어스 극장의 경우 관람료는 12페니로 상당히 비쌌다. 하지만 극장은 날품팔이 노동자로부터 귀족과 여왕에게까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었다.

-당시 극장 건물은 어떤 형태였나.

▶셰익스피어가 런던에 상경하여 일자리를 얻은 것으로 추정하는 쇼어디치 구역에 있는 시어터 극장은 팔각형의 3층 건물이었다. 건물에는 지붕이 딸린 사각형의 돌출무대(프로시니엄 무대)가 있었다. 하지만 무대를 둘러싼 마당은 위가 뻥 뚫린 맨땅이었다. 그래서 마당의 입석 관람자는 눈비를 맞으며 관람해야 했다.

마당을 빙 둘러싼 3층 건물은 갤러리라고 부르는 객석이 있었고 초가지붕이었다. 무대 안쪽 위에는 발코니가 있었다. 악사들이 자리 잡고 배경음악과 음향 효과를 연주하거나, 극 중 성벽 장면이나 발코니 장면을 연기하는 무대장치로 이용됐다.

영국의 그림책 작가이자 디자이너인 C. 월터 호지스가 1958년 사료에 근거해 그린 셰익스피어 시대 글로브 극장 구조도 

공연은 일요일과 사순절 기간을 제외하고는 매일 열렸지만, 흑사병이 발생할 경우 극장은 폐쇄되었다. 셰익스피어 생애에서 최악의 흑사병 창궐은 1592년 여름부터 1594년 봄까지, 그리고 1603년에 있었다. 1592년의 경우는 20개월 동안 극장 문을 닫아야 했고 두 경우 모두 런던 인구의 4분의 1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극단들은 보통 20~40편의 대본을 보유하고 거의 매일 또는 수일 간격으로 다른 작품을 공연했으므로 늘 대본 부족에 시달렸다. 셰익스피어는 20여년 동안 37편의 작품 즉 1년에 두 작품 꼴로 집필했다. 대본 부족 상태의 극단환경이 셰익스피어의 왕성한 창작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오후 2시 극장 지붕 위에 깃발이 올라가는 것을 신호로 공연이 시작되어 약 3시간 정도 공연이 이뤄졌다.  

-당시에도 무대조명이나 효과음, 분장 등이 있었나. 여성 역할은 누가 했나.

▶무대 조명은 공공 극장들의 경우 지붕이 없어 조명 없이 진행되었다. 1608년 셰익스피어 소속 극단인 왕실극단이 블랙 프라이어스 실내극장을 인수했는데, 그 극장은 촛불을 조명으로 이용했다.

배우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여성 역할은 소년이나 성인 남성이 연기했다. 영국 연극사상 최초의 여성 배우는 1660년 12월 8일 비어 스트리트 극장에서 공연된 '오셀로'에서 데스데모나 역을 맡은 마거릿 휴스였다.

분장은 시루스(연백분: 흰 납과 식초를 섞어 만든 화장 분)를 얼굴 전체에 바르고, 입술 화장이나 얼굴의 붉은 색조는 코치닐(선인장에 붙어 있는 깍지벌레 암컷을 말려 분쇄한 붉은 염료)을 썼다. '오셀로',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 등의 작품 속에 나오는 흑인 분장은 코르크 나무를 태운 재나 숯 검댕을 썼다. 피 흘리는 장면을 위해서는 돼지 등을 도살해 그 피를 사용했다. 또한 헤어스타일 분장에는 여러 종류의 윅(가발)을 이용했다.

의상은 당시 연극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였다. 조명을 이용하지 않았고 무대 장치가 거의 없는 이른바 '빈 무대'에서 공연이 이루어졌으므로, 배역에 맞는 다양하고 화려한 의상이 볼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 극단들은 의상을 준비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고 적지 않은 비용을 투자했다.   

-일년에 국내에서 셰익스피어 관련 논문은 몇편이 발표되나. 최근의 인기있는 연구 주제는.

▶국내의 셰익스피어 연구는 1963년 창립한 한국셰익스피어학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학회는 1971년 학회지 창간호를 발행한 이래 지난해까지 총 103권의 학술논문집을 통해 886편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에 1950~60년대의 자료와 연관 학회를 통한 발표를 포함하면 1906년 셰익스피어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110년 동안 약 1200여 편의 논문이 발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매년 국내에서는 전체적으로 약 40편의 연구 논문이, 전 세계적으로는 매년 2000여 편의 논문이 쏟아져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셰익스피어 연구의 비평적 관심사는 작품에 나타난 사회경제적·역사적 맥락 읽기, 문화상호주의적 관점에 따른 셰익스피어의 영향과 변주, 지역과 변방의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의 탈 중심화 논의 등 '시공을 초월한 셰익스피어의 재창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 묘비명에는 '내 유골을 움직이는 자에게 저주 있으리'라는 다소 수수께끼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셰익스피어가 이런 묘비명을 남긴 이유가 무엇으로 추정되나.

▶그의 묘비명 전문은 "선한 친구여, 제발 부탁이니/여기 묻힌 흙을 파내지 마오./이 돌들을 그대로 두는 자에게 복이 있고/내 유골을 움직이는 자에게 저주 있으리"이다. 고향에 돌아와  생을 마감한 셰익스피어의 시신은 마을 내 홀리트리니티 교회 제단 앞에 안장되었는데, 셰익스피어 당시엔 무덤 지기가 새로운 시신을 매장할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이전에 묻혀있던 시신을 파내서 화장하는 일이 흔히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무덤 지기 등이 자신의 시신을 파내지 못하도록 그러한 비명을 작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묘비명을 통해 영원히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은 소망을 표현했다고도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왜 위대한 작가로 평가되는가.

▶셰익스피어가 담고 있는 보편성과 예술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인간과 인간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 통찰하고 문화, 역사, 지역, 언어 그리고 시대를 초월해 공감과 깨달음을 불러 일으키는 내용을 작품에 담았다. 적확한 비유와 아름답고 심오한, 이른바 '마법 같은 언어'를 통해 독자와 청중의 마음을 쥐락펴락했다. 먼 과거에 존재했던 한 사람의 수백 년된 작품이 세계 곳곳에서 그대로, 혹은 창조적으로 변주되는 것은 그의 작품의 위대함을 말해준다.

셰익스피어의 37편의 작품 속에는 1100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한다. 인물의 신분적, 계급적 다양성도 놀랍지만 중요한 사실은 셰익스피어가 그 인물의 내면을 깊이있게 탐색했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는 인류사 어느 작가보다도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 주었다. 그런 이유로 그의 극은 공간 시간을 넘어 어떻게 변주되더라도 언제나 현재성을 나타낸다.

17세기 영국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벤 존슨은 셰익스피어를 '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만세(萬世)의 시인'이라고 찬양했다. 개인적으로도, 언어가 존재하는 한 셰익스피어는 기억될 것이고,  무대가 존재하는 한 셰익스피어는 불멸할 것으로 믿는다.

안병대 한국 셰익스피어 학회 회장© 안병대



ungaung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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