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헬싱키=뉴스1) 윤슬빈 관광전문기자 = 겨울의 헬싱키는 흔히 '볼 게 없는 도시'로 여겨진다. 하루해가 네댓 시간 남짓하고 흐린 하늘과 차가운 바람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행객은 곧장 라플란드로 향해 눈과 오로라를 찾는다. 하지만, 라플란드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잠시 머문 헬싱키는 그런 선입견과 달랐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도시가 품은 따뜻함이 선명했다. 바닷가 시장에서 맛본 뜨끈한 연어수프(Lohikeitto), 어둠 속에서도 빛을 품고 있는 도심의 건축물들, 크리스마스를 앞둔 광장의 분위기까지. 짧은 '레이오버'였지만 도시의 겨울은 생각보다 더 선명하고 풍부했다.

헬싱키의 겨울은 오전 7시가 넘어도 도시는 여전히 새벽 같은 어둠이 깔려 있고 건물 유리창과 트램 불빛만이 흐린 하늘에 작은 조명을 더한다. 공항에서 30분 만에 도착한 헬싱키 중앙역은 여행객보다 출근길 시민이 더 많은 풍경이었다.
역사 내부 카페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밖으로 나오니, 아직 해 뜨기 전인데도 도심 곳곳에서 크리스마스 준비가 한창이었다. 조명이 걸린 라시팔라치 광장(Lasipalatsi Square), 새벽부터 불이 켜진 카우파토리(Kauppatori) 주변, 버스와 트램이 교차하는 짧은 순간마다 '겨울 도시가 숨 쉬는' 느낌이 났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도시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여는 곳은 공공도서관 '오오디'(Oodi)다. 오전 8시 개관이지만, 이른 시간에도 이미 현지인은 문 앞에 모여 있었다. 오오디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중 하나로 꼽히는 곳으로 곡선형 목재 외관이 인상적이다.
안에 들어서면 큰 기둥 하나 없이 이어지는 개방형 공간, 북유럽 특유의 화이트 톤, 천장 아래 부드럽게 퍼지는 간접조명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서가보다 '머무는 방식'에 더 집중한 공간이라 소파·작업 테이블·작은 회의실·메이커스페이스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한겨울에도 이른 아침부터 자리마다 사람들이 앉아 조용히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열고 있었는데, 마치 도시의 '따뜻한 피난처' 같은 느낌이었다.
오오디에서 길만 건너면 키아스마 현대미술관(Kiasma)이 모습을 드러낸다. 금속 외관의 곡선이 강조된 건축물로 도시 풍경 자체의 흐름을 바꾸는 상징적인 작품 같은 공간이다. 전시는 대체로 실험적이고 현대적인 감각이 강한데 겨울 특유의 회색 빛 하늘 아래에서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키아스마에서 서쪽으로 5분쯤 더 걸으면 아모스 렉스(Amos Rex)가 이어진다. 지하 전시관 위로 공처럼 부풀어 오른 유리 돔들이 인상적인 광장은 헬싱키 겨울 풍경 속에서도 가장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장소다.
어른도 아이도 구분 없이 언덕 같은 돔 위로 올라가 뛰거나 굴러보고, 돔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며 인증샷을 남겼다. '미술관을 덮고 있는 조형물'이 아니라 '시민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공공 공간'처럼 쓰이는 모습이었다.

아모스 렉스를 뒤로하고 북서쪽으로 8~10분 정도 걸으면 헬싱키에서 가장 독창적인 건축물로 꼽히는 템펠리아우키오 교회(Temppeliaukion kirkko)에 도착한다.
멀리서 보면 바위 언덕처럼 평범해 보이지만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이 교회는 자연 암반을 그대로 파내 만든 세계 유일의 예배당이다.
1969년 문을 연 템펠리아우키오는 핀란드 건축가 형제 티모·투오모 수오말라이넨이 설계했다. 전쟁 이후 국가 재건 과정에서 "도시 한가운데 자연을 품은 성전"이라는 목표로 탄생한 공간이다.



내부는 인위적 장식을 거의 쓰지 않고 바위의 거친 표면을 그대로 노출했다. 천장을 덮은 2만m 길이의 구리 띠 돔은 촘촘하게 말려 있으며 돔 가장자리의 유리 틈새로 들어오는 산빛이 공간 전체를 부드럽게 감싼다.
이 교회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모양 때문만이 아니다. 암반이 만든 불규칙한 표면 덕분에 세계적 수준의 음향 공간으로 평가되며 매일 크고 작은 연주회가 열린다.
공간 곳곳은 종교적 분위기보다는 자연·예술·건축이 섞인 갤러리 같은 감각을 준다. 겨울 아침에는 흐린 북유럽 빛이 돔 사이로 들어오며 바위 표면이 미묘하게 빛나는 장면을 만들고, 이는 사진보다 훨씬 압도적이다.


암석교회를 나와 트램을 타고(또는 도보 15~20분), 바닷가 방향으로 내려가면 헬싱키의 상징적인 시장 카우파토리(Kauppatori·마켓광장)에 닿는다.
겨울의 바닷바람이 매섭지만, 광장 주변의 조명과 따끈한 음식 냄새가 묘하게 따뜻한 분위기를 만든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11월 말이라 곳곳에 조명이 달려 있었고 바닷가 특유의 차가움 속에서도 도시 전체가 '겨울 준비'를 마친 분위기였다.


마켓광장 옆으로 이어진 올드 마켓 홀(Vanha kauppahalli)은 1889년에 지어진 헬싱키의 가장 오래된 실내 시장이다. 겨울에 헬싱키를 찾는 여행자들이 "그래도 이곳만은 꼭 간다"고 말하는 이유는 단 하나, 따뜻한 핀란드 음식이 가장 확실하게 보장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코끝을 자극하는 건 연어수프(Lohikeitto) 냄새다. 커다란 냄비에서 크림과 딜 허브향이 퍼지고, 국물이 미세하게 보글거리는 모습은 추위에 얼었던 몸을 바로 끌어당긴다.

연어수프는 생각보다 진하지 않고 담백하다. 크림 베이스지만 무겁지 않고, 연어와 감자, 당근이 크게 들어 있어 한 그릇만으로도 든든한 식사다. 핀란드에서는 집집마다 미묘하게 레시피가 달라 '엄마 레서피' 같은 느낌이 나는 음식인데, 관광객에게는 가장 쉽고 빠르게 핀란드의 맛을 만날 수 있는 메뉴다.
시장과 마켓광장 식당 중 일부에서는 전갱이 튀김으로 널리 알려진 메뉴인 '무이꾸(Muikku)를 판매하지만, 실제로는 '전갱이'가 아니라 흰송어(whitefish)를 튀긴 것이다. 바삭한 껍질과 촉촉한 속살이 생각보다 부드럽고, 레몬 하나 짜 넣으면 겨울 바다 냄새가 살짝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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