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허고운 기자 = 6·25전쟁 당시 라트비아 국적의 병사 14명이 참전했던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참전 당시 라트비아 국적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미군 소속으로 참전해 라트비아가 공식 참전국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이는 전쟁기념사업회가 '6·25전쟁 아카이브' 사업의 일환으로 비공식 참전국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으로, 우리나라와 라트비아는 최근 상호 방문을 통해 참전용사들의 업적을 기리고, 전쟁 관련 자료 수집 및 활용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25일로 발발 75주년을 맞은 6·25전쟁은 유엔군이 대거 참전해 유엔(UN) 설립 이후 처음으로 집단안보체제가 실현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함의를 지닌다.
하지만 유엔군으로 전투병을 파병한 16개국과 의료지원을 한 6개국 등 총 22개국의 공식 참전국 외에도 실제로는 약 80개국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대규모 국제전으로 확장해 기록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인식이 제기되고 있다.
전쟁기념사업회는 지난 2022년부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6·25전쟁 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보존·활용하기 위한 '6·25전쟁 아카이브' 사업을 추진한 이후 '보이지 않는 참전용사'들의 존재를 조명하기 시작했다. 라트비아 참전 용사들의 발견은 기록의 정확성 등에서 현재까지 비공식 참전국 연구사업의 주요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까지 라트비아 국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소속 병사 14명이 확인됐고, 이들 중 4명은 한국에서 전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라트비아 용사들을 처음 발견한 이는 2015부터 2019년까지 주미 라트비아대사관에서 근무한 아리스 비간츠 라트비아 외교부 제재담당특별대사다. 그는 미군 참전자 명부에서 라트비아계 이름을 일일이 검색해 이를 다시 라트비아의 서류와 대조하는 방식으로 이들의 참전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영상 자료를 통해 참전 사실이 확인됐지만 이름 등 공식 기록의 추가 발굴이 필요한 용사도 1명이 확인됐다.
비간츠 대사는 미국 근무 이후 주한 라트비아대사로 일하며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을 이어가기도 했다.

비간츠 대사는 이달 초 전쟁기념사업회 관계자들과 라트비아에서 만났다. 그는 "참전용사들은 공산주의 체제에 맞서기 위해 참전했다"라며 "라트비아와 한국은 강대국에 둘러싸여 국난을 겪은 역사를 공유하는 나라로, 앞으로 더 많은 참전용사들을 찾기 위해 라트비아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많은 관심과 협력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1940년 소련의 침공, 1941년 나치 독일의 점령, 1945년 얄타 회담의 결과로 다시 소련으로의 편입 등 라트비아도 한국 못지않은 현대사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1944~1945년 약 12만 명의 라트비아인들이 독일, 오스트리아, 덴마크, 스웨덴 등지로 망명했고, 1948년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난민법에 서명하면서 라트비아인들의 미국 망명이 본격화됐다.
미국에 도착한 라트비아인들 중 일부는 빠른 동화를 위해 군 입대를 선택했다. 참전이 불가피하지만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제각기 입대를 자원했고, 많은 부모들도 '새 조국'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이를 지지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고, 미군이 참전하며 라트비아 병사들의 운명도 한국과 연결됐다.
6·25전쟁에 참전한 라트비아계 병사들은 대다수가 20대 초반의 청년이었으며, 미국에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어도 능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14명 중 아이바르스 카를리스 살레니엑스, 야니스 크루민스, 루돌프스 리에파, 브루노 글라제르스 등 4명은 전쟁 중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이름은 현재 전쟁기념관 미군 전사자 명비에 새겨져 있다.
전장에서 돌아온 라트비아계 병사들은 마침내 미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나 라트비아를 향한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참전용사인 구나르스 스톱니엑스는 "내 가슴엔 훈장 여럿과 전투보병휘장이 달려있지만 마음껏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라며 "한국의 전장에서 휘날린 수많은 국기 중 라트비아 국기는 없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전쟁기념사업회는 더 많은 이들에게 라트비아계 참전용사들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주한 라트비아대사관과 협력해 지난해 11월 전쟁기념관에서 '6·25전쟁에 참전한 라트비아 용사들' 특별전을 열었다. 개막식에 에드가르스 린케비치스 라트비아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달 7~9일에는 백승주 회장 등 사업회 대표단이 라트비아를 방문했다. 대표단은 라트비아계 참전용사를 처음으로 발굴한 비간츠 대사를 만났고, 라트비아 전쟁박물관을 관람했다. 박물관은 6·25전쟁 당시 라트비아계 미군들의 군복과 군모, 당시 촬영된 사진 등을 사업회 측에 공개했다. 이 유물은 향후 기념전시와 아카이브 콘텐츠로 활용될 예정이다.
주한 라트비아대사관과 라트비아 전쟁박물관은 "라트비아 병사들은 조국을 지킬 수 없었던 순간에도 자유와 평화를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라며 "6·25전쟁에 참전한 이들의 헌신은 민주주의와 인류 공동의 이상에 대한 깊은 믿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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