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최소망 기자 = 1970년대 초반, 냉전 체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유지되던 동서 진영의 대립이 완화됐고, 군사적 충돌보다 관리와 조정이 강조되는 '데탕트'의 흐름이 국제 질서의 '대세'가 됐다. 이같은 변화는 유럽과 동아시아를 포함한 주변 지역으로 확산했고, 분단된 한반도 역시 영향을 받았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 개선은 국제정치 전환의 분기점이었다. 미국과 중국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대사급 회담을 진행하고, 파키스탄 등 제3국 채널을 통해 비공개로 접촉했다. 1971년 7월 헨리 키신저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극비리에 베이징을 방문해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했고, 이 자리에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방중이 합의됐다. 1972년 2월, 냉전을 깨는 미·중 정상회담이 열렸다.
국제정치의 극적인 변화 여파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줬다. 닉슨 대통령은 1969년 7월 동맹국에 대한 방위 부담을 축소하겠다는,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고, 이는 동맹국들이 자국 방위에 보다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신호로 해석됐다. 미국은 약 2만 명의 주한미군 감축을 결정하고, 1971년부터 단계적으로 이행했다. 한국 사회 전반에 안보 환경 변화에 대한 불안이 확산했다.
극적인 정세의 변화를 마주한 박정희 정권은 대북 정책의 변화를 시도했다. 북측의 '태도 변화'라는 전제를 분명히 했지만, 대결적 관점을 버린 접근법을 처음으로 구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15 선언을 통해 "북한이 무력 통일 노선을 포기하고 이를 행동으로 입증할 경우, 인도적 견지와 통일 기반 조성을 위해 남북 간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이 선언 직후 남북 간 물밑 접촉이 본격화했다. 1971년 8월 12일 남측이 적십자 회담을 공식 제의하자, 북측은 이틀 뒤인 14일 이를 수락했다. 이후 같은 해 9월부터 1972년 8월까지 25차례에 걸친 예비회담이 진행됐다. 인도적 문제 논의를 위한 대화는 정치·군사적 긴장 완화 논의로까지 확장됐다. 1972년 5월에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했고, 이후 북한의 박성철 부총리가 서울을 답방하는 등 고위급 접촉도 이어졌다.
남북은 19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7·4 남북공동성명'을 동시에 발표했다. 이후락 부장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명한 공동성명은 7개 항으로 구성됐으며, '자주·평화·대단결'을 통일의 기본 원칙으로 제시했다.
남북은 공동성명에 외세 배제와 무력 사용 반대, 이념과 제도의 차이를 넘어선 민족적 단합, 평화적 통일 추진을 명시했다. 또한 △상호 중상·비방과 무장 도발 중지 △민족적 유대 회복을 위한 교류 확대 △적십자 회담의 조기 성과 도출을 약속했다. 여기에 서울-평양 간 직통전화 설치와 합의 이행을 위한 남북조절위원회 구성도 포함됐다. 분단 이후 남북이 통일 문제를 놓고 공동의 원칙과 행동 방향을 합의한 첫 공식 문서였다.

그러나 글로 표현된 합의와 달리, 남북관계는 구조적 전환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는 데탕트 국면을 기회보다는 위기로 인식했다. 남북 간 비밀 접촉과 7·4 공동성명은 평화 체제 구축의 출발점이 아니라, 유신체제 수립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됐다.
공동성명 발표 약 석 달 뒤인 1972년 10월, 남한은 10·17 비상계엄 조치를 단행했다. 대통령의 특별선언과 함께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국회는 해산됐다. 정당·정치 활동이 강제로 중지됐으며,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도 정지됐다. 남북 대화로 형성된 긴장 완화 국면은 곧 '위기관리'를 명분으로 한 강력한 통치 논리로 전환됐다.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조치의 배경으로 국제 정세 변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미·중 관계 개선과 데탕트의 흐름 속에서 열강이 약소국을 희생시킬 수 있으며, 급변하는 국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강력한 국가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사태 선포 직후 필립 하비브 당시 주한미국대사에게 이 같은 인식을 직접 설명했다. 그는 적십자회담 등 남북 간 긴장 완화 국면이 전개되고 있지만, 한국 사회가 북한에 절대 방심하지 않고 있음을 김일성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으며, 국제 환경이 변화하더라도 북한의 남침 위협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국내에 환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계엄 선포 후 개헌안 공고(10월 27일), 국민투표(11월 21일), 유신헌법 공포·시행(12월 27일)으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에서 "통일을 준비하려면 국가가 흔들려선 안 된다"는 논리가 제시됐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결과적으로 통일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장기 집권을 뒷받침하는 정치적 논리로 전환했을 뿐, 통일의 진정성은 없었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북한 역시 '평화'의 본질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북한은 1972년 12월 기존 헌법을 폐지하고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며 김일성 주석의 1인 지배 체제를 제도적으로 확고히 했다. 사회주의 헌법 5조에 자주·평화·민주주의적 방식의 통일을 국가적 과업으로 규정했지만, 주석제를 도입하며 사실상의 독재를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다. 남한이 '통일'을 내세워 초월적 독재를 공고히 했다면, 북한은 '자주'를 앞세워 처음으로 독재를 제도화한 셈이다.
이같은 남북의 행보와 비교되는 사례가 서독의 동방정책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데탕트를 '통치의 위기'로 여겼지만,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국가의 기회'로 인식했다.
서독의 동방정책은 1963년 베를린 통행증 협정을 중심으로 한 상호 접촉 확대와 에곤 바르의 '접근을 통한 변화' 구상을 거쳐,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을 통해 상주대표부 설치 등 '상호 인정의 틀'을 마련한 뒤 1973년 유엔 동시 가입으로 이어졌다.
![본문 이미지 - (평양 노동신문=뉴스1) = 북한 만수대언덕의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상.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DB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Redistribution Prohibited] rodongphoto@news1.kr](https://image.news1.kr/system/photos/2023/4/16/5941701/high.jpg/dims/optimize)
북한은 1972년 5월 비밀 접촉 과정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남북 정상의 '구상'이 달랐기 때문인지, 실제 정상회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만약 남북이 한반도 문제를 각자의 정치 문제 해결을 위한 카드로 활용하지 않고 진짜로 '통일'로 가기 위한 방안을 찾는다는 마음가짐을 가졌다면 한반도 역사의 궤적은 달라졌을까.
그러나 남북, 한반도 문제를 내부 정치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소비한 주체가 박정희 정권만은 아니다. 1972년의 짧은 대화 국면은 평화의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그 가능성은 남북 각자의 체제 강화 논리에 흡수됐다.
남은 것은 분단의 고착뿐이다. 이제라도 남북, 한반도 문제를 '내부 정치'와 연관된 사안이라는 인식을 정말로 '깨끗하게' 버리고, 새로운 관점으로 냉정하게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봐야 할 때다.
somangchoi@news1.kr
편집자주 ..."역사에 가정은 없다"라고 한다. 하지만 북핵 위기와 이념 갈등, 대화와 반목을 반복한 남북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때 이랬더라면'이라는 가정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남북이 놓친 '극적인 순간'으로 돌아가, 오늘의 위기를 기회로 되돌릴 지혜를 탐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