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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수'에 놓인 바둑…"바둑학과 폐지에 지원 예산도 삭감"

"그래도 바둑은 인생 활로…사라지지 않을 것"[리뷰1]

(서울=뉴스1) 유민주 기자, 박동해 기자 | 2024-04-07 06:30 송고
편집자주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매일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고 해명과 반박이 거듭되면서 본질은 사라지고 왜곡된 파편만 남게 됩니다. [리뷰1]은 이슈의 핵심을 한눈에 파악하고 전체를 볼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전문가와 현장의 목소리도 함께 담겠습니다.
4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기원. 2024.4.4/뉴스1 © News1
4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기원. 2024.4.4/뉴스1 © News1

"이 양반 12시 지나도 안 오면 오늘은 안 나온다는 건데..."

지난 4일 정오. 서울 종로구의 한 기원에서 만난 백발의 노장 전 모 씨는 시계를 보더니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이날 기원에 등장한 기사는 총 5명. 그는 옆 테이블 대국이 끝날 때까지 지켜만 봤다. 짝이 맞지 않아 당장 돌을 잡지 못하고 묵묵히 순서를 기다렸다.
바둑은 전 씨의 유일한 취미다. 50년간 취미 생활을 즐기는 동안 바둑의 세계는 전 씨가 따라잡기 어렵게 바뀌었다. 한때는 젊은 학생들이 기원을 찾아와 같이 대국을 했지만 요즘은 50대 이하는 구경도 못한다. 매일 기원으로 모이던 동네 바둑 친구도 선약 없이는 보기 어렵다.

"예전엔 젊은 사람도 많았어요. 종로3가 여기가 교통도 편리하고 먹을 것도 싸고, 기원도 모여있고 그러니까 사람이 많았는데, 이제는 나도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처지지."

사실 바둑이 처한 현실은 이미 숫자로 드러나고 있다. 대한바둑협회가 발표한 '바둑 국민인식 및 이용 실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에 '바둑을 둘 줄 아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32%인 1500만명으로 추산됐으나 지난해 기준으로 전 국민의 19%인 883만명으로 떨어졌다. 국민 10명 중 약 4명 정도는 바둑에 관심이 있지만 그중에도 적극 관심층은 10%대인 것으로 조사됐다.

◇ "학과 폐지, 예산 전액 삭감…바둑계 위기감 커져"
바둑 인기가 사그라든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다만 최근 바둑계의 위기감이 부쩍 커진 것은 세계 유일의 명지대학교 바둑학과의 폐과가 결정됐기 때문이다. 지난달 25일 명지대는 교무회의를 열고 재정 악화와 바둑 인구 감소 등을 이유로 폐과를 결정했다. 당장 '학업'과 '프로기사', 둘 중 어느 것도 내려놓지 못한 학생들에게 바둑학과 폐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한국바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최찬규 군(17)은 지난 4일 <뉴스1>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바둑학과 폐과는 1년 전부터 들었기 때문에 1, 2학년은 못 간다고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서도 "올해부터 신입생을 안 받는 것은 몰랐기 때문에 3학년 선배들이 상당히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다"고 했다.

최 군은 "여기 학생들의 장점이 바둑이기 때문에 자신 있는 분야로 대학을 가려면 명지대 바둑학과 진학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며 "학교는 다른 대학에 바둑학과 개설이 추진될 수 있다고 공지했고 아직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나중에 내가 3학년이 될 때쯤이면 또 생길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서 아직은 바둑학과를 목표로 잡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14년 이세돌 9단이 한국 유일의 바둑고등학교인 한국바둑고를 찾아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전남도교육청 제공) 2016.3.15/뉴스1 © News1 전원 기자
지난 2014년 이세돌 9단이 한국 유일의 바둑고등학교인 한국바둑고를 찾아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전남도교육청 제공) 2016.3.15/뉴스1 © News1 전원 기자

1997년 세계 최초로 개설된 바둑학과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바둑계에서도 다시 한번 한국 바둑 보급의 명맥이 끊길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현직에서 활동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는 최규병 프로 9단은 "바둑학과가 사라지면 더 나은 '바둑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 어려워 질 수도 있다"며 "진학을 포기하고 바둑 외길만 걸어온 학생들에게 바둑학과는 '입단을 설사 못해도 그동안 해온 바둑을 통해 대학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통로이기도 했다. 바둑학과가 사라지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공부'와 '바둑' 사이에서 결정해야 되는 순간이 지금보다 더 앞당겨져서 바둑 영재 교육 시기를 놓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여기에 올해 대한바둑협회의 예산이 전액 삭감된 것도 한국 바둑 위기설에 무게를 더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21억6200만원이었던 대한바둑협회 지원 예산을 올해 전액 삭감했다.

대한바둑협회 관계자는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기원과 배분을 한다는 입장이지만 구체적으로 아직 금액이 정해지지 않았다"며 "원래 21억원대에서 현재는 3분의 1 수준으로 계획을 맞추려다 보니 보급 차원으로 알리는 목적의 사업이나 대회 축소는 상당히 클 예정"이라고 말했다.

◇ "바둑은 절대 사라질 수 없어"…돌을 놓지 않는 사람들

줄어드는 관심 속에도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각자의 이유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기원에서 만난 어르신들에게 바둑은 '오래 둬야 제맛'을 느낄 수 있는 놀이었다.

1997년도부터 종로에서 기원을 운영하며 수많은 대국을 지켜봐 온 김종홍 씨(79)도 홀로 텅 빈 기원을 지키고 있었다. 시선은 작은 텔레비전에 고정돼 있었다. 바둑TV에서 프로들의 대국을 중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바둑이 원래 시간제한이 없는 것이 묘미인데 속기가 점점 확장되면서 얘들이고 어른이고 속도전에 빠져 들어서 오래 두는 '맛'을 못 느끼게 된 것 같다"고 했다.

김 씨는 "예전에는 '봉수(封手)라고 해서 하루 두다가 안 끝나면 그날의 마지막 수를 종이에 써서 봉해 놓고 다음날 다시 와서 승부를 겨뤘다"며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고 대부분 길어도 3시간이면 끝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체력의 한계로 토요일까지만 기원을 연다. 과거에는 일요일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서 매일 기원으로 출근했지만, 이제는 주말에 찾는 사람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김 씨는 "기원이 망해가도 바둑은 절대 없어질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단어들도 바둑에서 나온 용어들이 많기 때문에 절대 쉽게 잊힐 수는 없다. 바둑업계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바둑이라는 문화는 이미 우리 일상 그 자체다"고 했다.

4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기원에 놓인 예약판. 2024.4.4/뉴스1 © News1
4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기원에 놓인 예약판. 2024.4.4/뉴스1 © News1

옆 골목에서 기원을 운영하는 70대 손희열씨도 바둑은 은퇴 후 유일한 '낙'이었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교류하는 것이 좋아서 기원을 차렸다.

오전에 찾아온 단골손님 두 명이 눈앞의 바둑판을 빼곡히 채워가고 있었다. 60석 규모의 공허한 기원에 바둑돌 소리가 더 매섭게 울렸다. 구석에 세워진 작은 화이트보드에 정갈한 글씨로 적힌 동호회명과 예약 날짜들을 보니 한동안 기원을 가득 메웠을 경쾌한 바둑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손 씨는 "바둑 동호회에서 오기도 하는데 그 숫자도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며 "처음 시작할 때 종로에 기원이 18개 있었는데 지금은 10개 정도 남았고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프로를 꿈꾸는 학생들에게도 바둑은 여전히 이루고 싶은 '목표'이자 '유일한 길'이었다.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충암바둑도장에서 만난 변 모 군(18)은 하루 평균 10시간을 바둑에 매진한다고 했다.

그는 "바둑이 힘들어서 한 달 정도 쉰 적이 있었는데 그때 허전함을 크게 느끼고 내 인생에서 바둑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꽤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오래하면 질리는 건 당연하기 때문에 균형을 잘 잡아서 스스로를 정해놓은 규율을 하루하루 지켜나가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youmj@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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