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신기림 기자 =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연준)를 새로 이끌 의장으로 지명된 케빈 워시(55)는 "돈줄을 죄어야 금리를 낮출 수 있다"는 역설을 설파한다. 또 글로벌 물류 기업의 이사로 활동하며 직접 체험한 AI(인공지능) 생산성 혁명이 물가를 낮춰줄 것이라 확신한다.
시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저금리를 원하기 때문에 비둘기파를 선호할 것으로 봤지만, 트럼프의 선택은 매파 워시였다. 워시가 트럼프에게 "양적긴축(QT)과 AI를 통해 인플레이션 없는 성장(골디락스)을 만들어주겠다"는 새로운 해법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워시의 첫 번째 승부수는 연준의 대차대조표 축소(QT)다. 그는 지난해 7월 8일 폭스비즈니스 '래리 커들로 쇼' 인터뷰에서 양적긴축을 통한 금리인하라는 역설적 논리를 처음 공개했다.
당시 워시는 "2008년 위기 때 돈을 푼 것이 금리 인하 효과를 냈다면, 반대로 지금은 연준의 대차대조표를 수조 달러 줄이는 QT를 통해 물가 압력을 없애 빅 컷(Big Rate Cut)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린다"고 단언했다.
통상 시장 금리(특히 10년물 국채금리)에는 앞으로 물가가 오를 것이라는 불안감(기대 인플레이션)이 웃돈(프리미엄)처럼 붙어 있다. 워시의 계산은 연준이 시중의 돈을 빨아들여(QT) 기대 인플레이션을 원천 봉쇄하면, 장기 금리에 붙어 있던 프리미엄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금리가 안정된다는 것이다.
즉, 장기 금리의 거품을 QT로 걷어낸 뒤 이를 명분 삼아 기준 금리를 과감하게 내리겠다는 선(先) 긴축 후(後) 인하 전략이다. 고통스럽더라도 돈줄을 죄어 금리가 높아야 할 원인인 물가상승 기대 자체를 제거하겠다는 정공법인 셈이다.
워시가 물가 안정을 자신하는 또 다른 배경은 AI 생산성이다. 워시는 자신이 파월 의장처럼 상아탑에 갇힌 이론가가 아니라는 점을 자부하는데 낡은 경제학 모델 대신 기업 현장을 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세계 최대 물류 기업 UPS와 한국의 쿠팡 등 혁신 기업의 이사직을 두루 역임했다. 물류 현장에서 AI와 머신러닝이 어떻게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효율을 폭발시키는지를 뼈저리게 체험한 것이다.
또한 그는 실리콘밸리의 심장부에 위치한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워싱턴의 관료들은 보지 못하는 AI 생산성 혁명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했다.
워시는 이러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AI 낙관론을 경제학적으로 긍정적 공급 충격(Positive Supply Shock)이라고 정의한다. 지난해 8월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문에서 그는 "연준이 수요 억제에만 매몰돼 기술 혁신이 가져오는 생산성 향상 효과를 간과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WSJ에 따르면 워시의 롤모델은 1990년대 인터넷 혁명을 믿고 금리 인상을 자제해 장기 호황을 이끈 앨런 그린스펀 전 의장이다. 워시는 지금의 실리콘밸리발 AI 혁명이 그때와 똑같이 물가를 낮추는 강력한 힘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마크 다우딩 블루베이 자산운용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블룸버그에 "워시는 AI 생산성 향상이 인플레이션을 억제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자신의 금리 인하 스탠스를 정당화하려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워시에게 AI는 금리를 내려도 물가가 튀지 않게 막아주는 든든한 방패인 셈이다.

워시 지명 직후 시장은 '금값 폭락'과 '장기 금리 급등'이라는 상반된 신호를 동시에 보냈다. 워시가 표방하는 통화 정책의 모순을 여실히 드러내는 반응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금 시장은 워시를 신뢰했다. 이날 금값은 장중 5300달러를 넘겼으나 워시 지명 소식에 5000달러 선이 붕괴되며 폭락했다. 금 시장 참여자들이 워시의 '강력한 긴축(QT)과 AI 혁명'이 결국 인플레이션을 잡을 것(디스인플레이션)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가가 잡히면 인플레 회피 자산인 금의 매력은 사라진다.
채권 시장은 '물가'가 아니라 '수급'을 걱정한 것이다. 트럼프 정부가 빚(국채)을 찍어내는데 워시마저 연준 보유 국채를 내다 팔면(QT), 시장에 채권 물량이 넘쳐나게 된다. 이를 받아줄 수요가 부족하니, 투자자들은 "물가는 잡힐지 몰라도 빚더미인 미국 국채를 보유하는 위험 수당(기간 프리미엄)을 더 달라"며 금리를 끌어올린 것이다.
워시의 AI 디스인플레이션 논리에 심각한 시차(Time lag)의 오류가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AI가 전 산업에 확산해 생산성을 높이고 물가를 낮추기 이전에 데이터센터 구축 등에 따른 막대한 전력·구리·반도체 소비로 단기적으로는 오히려 물가를 자극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필립 제퍼슨 연준 부의장은 "AI가 단기적으론 인플레 압력을 높일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정책 모순에 대한 우려도 크다. 금리 인하라는 액셀과 양적긴축이라는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으면 시장의 유동성 배관이 막혀 단기 자금 시장의 발작을 부를 수 있다는 지적이다.
빌 더들리 전 뉴욕 연은 총재는 워시 지명 전인 지난 16일 블룸버그 TV에 출연해 "긴축(QT)과 완화(인하)라는 상반된 신호를 동시에 보내는 것은 정책 효과를 반감시키고 시장의 불확실성만 키울 수 있다"며 워시식 해법을 일찌감치 경고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장기 금리 급등을 인플레이션 재발의 전조로 해석하기도 한다. 채권 자경단(Bond Vigilantes)이라는 용어의 창시자인 에드 야데니 야데니 리서치 대표는 30일 워시 지명 직후 고객 메모를 통해 "장기 금리가 치솟는 것은 채권 자경단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는 신호"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워시의 섣부른 금리 인하가 인플레이션을 다시 자극할 것이라는 공포가 국채 투매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결국 워시의 실험은 AI와 긴축으로 물가를 잡는 속도가 트럼프의 빚 늘리는 속도를 앞설 수 있느냐에 달렸다. 트럼프 2기 경제가 AI 기반의 골디락스로 가느냐, 수급 붕괴와 인플레 재발로 인한 금리 발작으로 가느냐의 위험한 도박판 위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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