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강경수 KIST 센터장 = 고대 그리스 미노안 유적에서는 양귀비 머리핀을 꽂은 독특한 형태의 ‘양귀비 여신 조각상’이 발견되었다. 고고학자들은 고대 미노스인들이 치유와 황홀경을 동반한 종교의식에서 양귀비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를 통해 인류가 청동기 시대부터 양귀비를 사용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 과학자들은 양귀비로부터 모르핀(Morphine)을 정제하여 강력한 진통제로 개발하게 된다.
동양에서도 비슷한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 전통의서에 따르면 개똥쑥은 말라리아 증상 완화에 사용되었는데, 중국의 과학자 투유유 박사는 개똥쑥으로부터 아르테미시닌(Artemisinin) 성분을 분리하여 말라리아치료제로 개발하였고, 이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아르테미시닌은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말라리아 치료제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인류가 축적해온 전통적인 약용식물 활용 경험은 현대 신약 개발에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더불어 우리 선조들이 축적한 의약학 연구지식의 집성체라 할 수 있는 향약집성방, 동의보감은 등은 현대 의약학 발전에 귀중한 영감을 줄 수 있는 자산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의약품의 약 50% 정도는 천연물 그 자체이거나, 천연물 유도체로부터 개발된 것이다. 따라서 식물, 미생물에 함유된 천연 화합물의 구성을 파악하고, 이로부터 유효한 활성을 가지는 화합물을 빠르게 식별하는 스크리닝(screening) 과정은 신약 개발의 핵심 단계이다.

전통적인 의약품 후보물질 스크리닝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전통지식과 의약고서에 기반한 지식기반 탐색(Knowledge-based screening)이며, 두 번째는 방대한 천연물 자원을 확보하고 이를 무작위로 시험하는 무작위 탐색(Random screening)이다. 전자는 방대한 고문헌을 분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으며, 후자는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는 단점이 있다.
이러한 천연물 의약품 후보물질 탐색 방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예측형 인공지능(AI)과 에이전트형 AI 기술이 주목받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면 천연물 의약품 후보물질을 탐색하는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의약고서에 포함된 방대한 정보를 학습한 AI는 특정 질환에 유효한 약재를 예측할 수 있으며, 무작위 스크리닝 방식에 예측 알고리즘을 접목함으로써 천연물 의약품 탐색 및 검증 효율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
최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천연물연구소에서는 자체 보유한 천연물 실물 라이브러리를 디지털화 하고, 단백질 타겟을 예측함으로써 특정 질환에 유효한 천연 화합물을 예측할 수 있는 천연물 인공지능 플랫폼인 ‘NPI-finder’를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KIST 연구팀은 자체 개발한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하여 신약후보물질 예측 국제 경진 대회인 CACHE챌린지 대회에 출전한바 있고, 2회 연속으로 세계 최상위 연구팀에 선정된바 있다. CACHE챌린지 대회는 아스트라제네카, 바이엘 등 글로벌 제약사가 참여하고, 캐나다 정부 및 미국 국립보건원(NIH) 후원하는 국제 대회로, 이는 KIST의 인공지능기반 신약후보물질 개발 기술력이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KIST가 보유한 단백질 타겟 예측기반 천연물 AI 기술은 향후 다른 예측형·에이전트형 AI기술과 융합되어 천연물 기반 신약개발의 전 과정을 통합하고 자동화하는 혁신적인 플랫폼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고문헌분석, 의약문헌 빅데이터 분석, 생물자원 유전체 해석, 천연화합물 합성생물학 자동설계, 화합물의 독성·약동력학 예측, 인간유전체 기반 치료예측 등 다양한 예측형 AI기술과의 연계를 통해 시너지 효과가 기대된다.
이처럼 인류가 오랜 세월 축적해온 전통 의약지식, 실험 정보와 첨단 인공지능 기술의 융합은 천연물 의약품 개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천연물 기반 신약개발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예측형·에이전트형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선제적 투자와 과학기술 인프라 구축이 필수적이다.
나아가 동의보감과 같은 전통지식 자산과 국내 생물자원 유전체 정보, 천연물 유래 화합물의 화학·생리활성 실측데이터를 디지털화하고, 이를 AI와 연계함으로써, 미래 천연물 의약학 원천기술을 선도할 수 있는 국가적 전략이 필요하다.
◇강경수 KIST 천연물시스템생물연구센터장
△서울대학교 응용생명화학 박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연구원/선임연구원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융합의과학부 겸임교수
esther@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