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이재영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 한국은 특이한 나라다. 피겨의 불모지라고 할 만큼 선수층이 얇은데 피겨 여왕 김연아가 나왔고, 축구 강국에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유소년팀이나 프로팀이 적은데도 손흥민 같은 월드클래스 선수가 나왔다. 바둑에서도 종주국이라고 자부하는 일본이나 중국을 압도하는 이창호, 이세돌, 신진서가 연달아 등장했다. 한국인의 자질이 뛰어나서이기도 하고, 논 팔고 소 팔아서 여러 자식 중 하나를 애지중지 키워낸 엘리트 교육의 결과이기도 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공정하고 체계적인 지원으로 선수층을 두껍게 만들면 양궁처럼 수십 년째 천하무적으로 세계를 호령한다.
과학계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한국 이공계는 부실한 인프라와 넉넉지 않은 지원에도 탁월한 성과를 내는 과학자를 적지 않게 배출해 왔다. 될성부른 나무만 골라서 떡잎부터 집중적으로 길러낸 결과다. 그러나 홀로 외롭게 큰 나무는 바람에 취약하고 울창한 숲을 이룰 수도 없다. 언제까지 개천에서 용이 나기를 기다릴 것인가? 용이 나더라도 개천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필요한 게 뛰어난 자질의 인재들이 서로 협력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다.
이공계 인재 양성을 생태계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그런 점에서 절실히 필요하다. 과학 강국은 뛰어난 한두 명의 스타 과학자가 있는 나라가 아니라, 스타 과학자가 될 잠재력을 갖춘 무수한 인재들이 두터운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나라다.
이공계의 두터운 교육과 연구 생태계 구축 필요를 강조하니, 인구 감소와 의대 선호 풍조 등으로 인한 이공계 인력 부족을 하소연하는 소리가 들린다. 근래 대학의 현실이 그만큼 녹록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아직도 이공계 진로 선택에 소극적인 점을 생각하면 답이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도래한 AI(인공지능) 시대는 과학계에 여성 인재들이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이 광활하게 펼쳐지는 시대다.
글로벌 무대에서는 ‘AI의 대모’로 불리는 스탠퍼드대학의 페이페이 리, 챗GPT 개발을 이끈 미라 무라티, ‘딥시크’의 핵심 개발자인 1995년생 뤄푸리 등 많은 여성 과학자가 세계 AI 발전과 과학기술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이런 여성 인재들이 진입하여 미국과 중국의 과학기술 생태계를 더욱 두텁게 만들었고, 그렇게 두터워진 과학기술 생태계가 잠재력 있는 인재들을 스타 과학자로 성장시켰다. 여성 인재 유입과 스타 과학자로의 성장이라는 선순환이 과학기술 생태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AI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도 그렇게 견고한 과학기술 생태계를 구축한다면 인구의 절반인 여성 인재들을 이공계로 인도하여 훌륭히 길러낼 수 있다.
이공계 여성 진출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강한 생태계를 만들려면 변화가 필요하다. 우선 교육과 연구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연구자들이 단기적 성과에 목을 매고 연구비에 전전긍긍하는 풍토에서는 여성 인재들의 진출을 기대할 수 없다. 평생을 바쳐 안정적으로 연구하며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둘째, 롤모델이 되는 여성 과학자들의 멘토링이 필요하다. 이미 진입한 여성 인재가 리더로 성장하는 걸 봐야 후배들이 그 길을 따라간다. 셋째, 사회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여성의 역할을 특정 분야로 한정하는 관념을 없애야 하고, 과학기술 영역이 여성에게 적합하다는 인식을 확산해야 한다.
넷째, 초등학교 때부터 여학생들이 과학기술에 더 많이 관심을 가지도록 적극적인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 여성 과학자들의 성공 사례를 많이 접하게 하고, 과학에 관심을 유발하는 창의적인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 다섯째, 결혼, 출산, 육아 등의 이유로 경력이 단절되어 중도에 연구자의 길을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적극적인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
손흥민 선수 한 명이 한국 축구를 세계 최강으로 만들 수 없고, 김연아 선수 한 명이 한국 피겨를 세계 최고로 만들 수도 없다. 한국에는 김빛내리 교수 같은 세계적인 여성 과학자들이 있지만, 튼실한 생태계가 없는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는 이 학자들에게 언제까지 홀로 무거운 짐을 지게 할 수는 없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 인재에게 이공계의 문턱을 넘어 과학 강국의 깃발을 들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그들이 지속해서 협력하며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