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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유엔참전국⑦] 필리핀, 율동전투 영웅 '콘라도 디 얍' 대위

역습으로 고지탈환…용맹하게 싸운 '파이팅 필리피노'
독립 후 힘든 상황서 파병…서울재탈환 작전 등 참전

(부산=뉴스1) 이유진 기자 | 2022-10-01 08:00 송고
편집자주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유엔 22개국에서 195만7733명이 참전했다. 참전용사들의 용기와 활약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다. <뉴스1>은 유엔평화기념관과 함께 2023년 정전협정 70주년을 앞두고 한 달에 한번 총 21회에 걸친 ‘이달의 유엔참전국’ 연재를 통해 유엔참전국과 참전용사의 활약상을 조명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콘라도 디 얍 대위.(국가보훈처 제공) 
콘라도 디 얍 대위.(국가보훈처 제공) 

파이팅 필리피노(Fighting Filipinos).

이는 6·25전쟁 중 발생한 율동전투에서 중공군에 물러서지 않고 용맹하게 싸운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 병사들을 일컫는 별칭이다.
필리핀 대대의 대표전투로 꼽히는 율동전투는 중공군 춘계공세가 한창이던 1951년 4월22일 경기 연천 북방의 율동에서 발발했다. 당시 필리핀 대대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공격에 맞서 싸웠다.

율동은 강원 철원과 서울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 인근으로 당시 재탈환한 서울을 다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지켜야하는 매우 중요한 길목이었다. 필리핀 대대는 이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격으로 상위 지휘본부와 통신이 두절되기도 했다.

중대장 ‘콘라도 디 얍’ 대위는 퇴로차단의 위기에서 방어전을 펼치던 중 대대장으로부터 즉각 철수할 것을 지시받았다. 하지만 그는 생존자를 구출하고 전우들의 시체를 수습한 후 철수하겠다고 보고한 뒤 역습을 감행했다. 얍 대위의 지휘 아래 필리핀 대대는 과감하게 적진을 돌파하면서 고지탈환에 성공했다. 또 부상자 2명을 구출하고 전사한 부대원들의 시체까지 수습했다.

이 과정에서 얍 대위는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지만 율동전투의 영웅으로 남았다. 그는 탁월한 상황판단과 지휘능력 등 공적을 인정받아 미국 수훈십자훈장, 필리핀 최고 무공훈장, 대한민국 정부의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경계태세 중인 필리핀군.(유엔평화기념관 제공)
경계태세 중인 필리핀군.(유엔평화기념관 제공)

필리핀은 1950년 9월부터 1955년 5월까지 총 7420명의 병사를 한국에 파병했다. 필리핀한국원정군(PEFTOK)으로 명명된 부대는 1950년 9월2일 필리핀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해외파병식 후 마닐라항을 출발해 같은달 19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당시 필리핀은 독립한 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상황으로 공산당 반군과의 싸움이 마무리되지 않아 정치적·경제적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필리핀은 6·25전쟁 참전을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명예로운 일로 여겨 한국 파병을 결정했다. 이는 미국·영국에 이어 세번째로,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가장 먼저 파병이 이뤄졌다.

콘라도 디 얍 대위 훈장.(유엔평화기념관 제공)
콘라도 디 얍 대위 훈장.(유엔평화기념관 제공)

초기부터 참전한 필리핀 대대는 낙동강방어선전투를 시작으로 38도선을 넘어 평양·군우리까지 진격했다. 1·4후퇴 당시 서울방어와 1951년 3월 서울재탈환 작전에도 참가했다.

1개 대대 전투단을 지속적으로 파견한 필리핀은 정전협정 이후에도 1955년 5월까지 부대를 한국에 주둔시키며 평화유지에 힘썼다. 필리핀군은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 표창 3회, 을지무공훈장 8회, 충무무공훈장 23회 등 수많은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oojin77@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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