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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은 어디까지 착해질 수 있나…전기車 폐배터리 소재의 변신

[그린경쟁시대 딥체인지⑦] 폐분리막으로 옷 만드는 '라잇루트'
플라스틱 오염 줄이면서 고기능성 옷 제작…'환경' 가치 창출

(서울=뉴스1) 문창석 기자 | 2020-12-30 06:10 송고 | 2020-12-30 13:59 최종수정
사회적기업 '라잇루트' 사무실에 배터리용 분리막이 진열돼 있다. 2020.12.23/뉴스1 © News1 이성철 기자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의 한 의상 작업실에는 약 1m 너비의 흰색 필름이 커다란 종이 심지에 두루마리 휴지처럼 둘둘 말려 있었다. 만져보니 일반 비닐처럼 얇지만 알루미늄 포일 같은 금속 재질의 바스락거림도 느껴졌다. "정말 이걸로요?" 의아해하는 기자의 질문에 유정우 라잇루트 이사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걸로요!"

얇은 필름 형태의 폴리올레핀(PO)으로 만들어진 분리막은 양극재·음극재·전해액과 함께 전기차 배터리를 구성하는 4대 핵심 소재다. 배터리 안에서 양극과 음극이 접촉하지 않도록 분리하는 동시에 미세한 구멍이 있어 리튬이온은 통과하도록 하는데, 이 역할을 하지 못해 양극재와 음극재가 닿을 경우 화재가 날 수 있다. 최근 코나 전기차의 화재도 이 분리막이 손상돼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렇게 배터리의 안전성과 직결되는 중요한 소재인 만큼, 제품 표면에 약간의 흠집만 있어도 바로 폐기된다는 점이다. 흠집이 없더라도 팔리지 않은 재고 역시 일정 기간이 지나면 버려진다. 그 양도 상당한데, 분리막을 생산하는 국내 한 중견업체는 자사에서만 매달 100만제곱미터(㎡)의 분리막이 버려지는 것으로 추산한다. 이는 축구장 면적(7700㎡)의 130배에 달하는 양이다.

현재 업계 전체에서 얼마나 많은 분리막이 폐기되는지는 집계된 수치가 없지만, 다른 생산 업체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만큼 국내에서 버려지는 분리막은 막대할 수준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버려지는 분리막의 주성분은 플라스틱 원료로 만들어지는 폴리올레핀이다. 분리막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폐수와 탄소가 이미 발생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플라스틱 제품을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버리면서 또다시 환경 문제를 일으키는 셈이다.

분리막을 접착한 의류 원단. 2020.12.23/뉴스1 © News1 이성철 기자

라잇루트는 이렇게 버려지는 분리막을 활용해 울코트와 아웃도어 같은 의류를 생산하는 국내 스타트업이다. 옷의 재료가 되는 원단의 안쪽에 분리막을 접착한 후, 분리막과 신체가 닿는 부분에 안감을 대면 영락없는 일반 옷이다. 이날 기자가 입어 본 시제품의 경우 외관과 착용감, 무게감 등에서 일반적인 의류와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분리막 덕분에 빳빳해 구겨짐이 덜할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중요한 건 분리막으로 옷을 만들 경우 미세한 구멍이 있는 소재의 특성이 빛을 발한다는 점이다. 분리막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공(pore)이 수없이 많은데, 이 지름은 물방울보다 작지만 수증기 분자보다는 크다. 그래서 옷 외부에서 안쪽으로 물방울을 통과시키지 않는 방수성이 있어 젖지 않으면서도 땀이 나면 옷 내부의 습기는 쉽게 내보낼 수 있다. 자체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분리막 필름은 의류용 폴리우레탄과의 성능 비교에서 내수압과 공기투과도가 비슷하고 투습도는 4~5배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울(wool) 소재와 접착해 의류를 제작하면 울의 장점인 부드러운 촉감을 살리면서도 분리막의 특징인 투습성과 방풍성까지 갖춰 기존의 울코트보다 보온 기능이 뛰어나다는 평가다. 기능성이 중요한 아웃도어 의류에도 적용할 수 있으며 분리막 소재로 만든 텐트도 양산을 준비하고 있다. 신민정 라잇루트 대표는 "옷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분리막의 기능성은 고어텍스 수준이고, 시중에서 판매되는 일반적인 옷보다는 더 훌륭하다"고 말했다.

버려지는 분리막을 사용하기에 가격도 낮다. 업계에 따르면 대표적인 아웃도어 소재인 고어텍스를 만들 수 있는 멤브레인 필름의 가격은 야드당 3~4달러 수준인데, 같은 크기의 폐분리막은 그보다 수십배 낮은 가격에 확보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분리막 업체 입장에선 폐기물을 처리하는 데 비용을 들일 바에는 차라리 싼 가격이라도 판매하는 게 나아서다. 현재 특허출원을 마친 라잇루트는 내년 6월까지 양산 시스템을 구축해 하반기부터 의류 제품을 판매할 예정이다.

폐분리막을 활용해 제작한 의류 시제품. 2020.12.23/뉴스1 © News1 이성철 기자

분리막을 활용한 의류는 경제적 가치뿐만 아니라 '환경'이라는 사회적 가치까지 창출할 수 있다는 평가다.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는 것은 물론이고, 고기능성 옷이라 오랜 기간 사용할 수 있어 옷 소비도 줄일 수 있어서다. 영국의 환경단체 랩(WRAP)에 따르면 옷의 수명이 9개월 연장될 경우 생산 공정에서 발생하는 탄소와 폐수, 산업 폐기물 등이 최대 30% 감소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렇게 버리는 소재로 의류를 만드는 '친환경 패션' 사업은 점점 확대될 전망이다. 거대 글로벌 의류 브랜드 H&M은 2030년까지 모든 제품을 지속가능한 소재로 제작하겠다는 계획을 내놨고, 미국의 에버레인도 내년까지 100% 재활용 섬유만 쓰겠다고 공언했다. 자라와 아디다스 등 글로벌 패션 기업들도 리사이클 제품의 비중을 늘리겠다고 밝히는 등 재활용 섬유의 수요는 계속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포도를 이용해 가죽과 유사한 직물을 만들어 옷·구두·가방 등을 제작하는 이탈리아의 베제아(Vegea)는 H&M이 자사 패션쇼에 내세우고 벤틀리가 신차 인테리어 가죽에 선택할 정도로 성장했다. 와인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포도씨·껍질 등 폐기물로 제품을 만든다는 점에서 폐분리막으로 기능성 옷을 제작하는 라잇루트 사례와 유사하다. 라잇루트는 이런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역량을 인정받아 최근 SK이노베이션이 시행한 관련 공모전에서 2억원을 투자받기도 했다.

의류를 구입할 때 가격과 품질, 디자인만 따지는 게 아니라 환경을 중요시하는 소비자들의 인식도 점점 커지는 만큼 관련 사업 기회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신 대표는 "너무나 잘 만든 분리막이 쓰이지 않고 그냥 버려진다는 건 매우 큰 문제"며 "이 소재를 활용하면 환경문제 해결에 더욱 가까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버려지는 배터리 분리막을 재활용해 의류를 제작하는 사회적기업 '라잇루트' 사무실에서 관계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2020.12.23/뉴스1 © News1 이성철 기자



themo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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