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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안 하면 밀려나…기업의 운명까지 바꾸는 시대 됐다

[그린경쟁시대 딥체인지④] ESG, 이제 선택 아닌 필수
투자 여부 판단의 핵심…리스크 관리 아닌 사업 기회

(서울=뉴스1) 문창석 기자 | 2020-12-02 07:00 송고 | 2020-12-02 10:35 최종수정
© News1 최수아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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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기업의 최고 가치를 수익 창출로 여기던 시절에 투자자들은 게임의 규칙을 지키면서 최대한의 이익을 내는 기업에 투자했다. 이제 투자자들은 돈을 얼마나 버는 게 아니라 어떻게 버는지 따진다. 그렇게 바뀐 사회에선 품질 좋은 물건과 낮은 가격이 아니라, 착한 경영이 더 많은 투자를 받고 돈을 벌게 됐다.

최근 투자자들에게 기업 경영의 새로운 지표로 자리잡은 건 'ESG'다.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의 앞 글자를 딴 용어로, 기업의 비재무적 성과를 투자 지표로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매출액과 영업이익 같은 재무적 정보가 아니라 환경을 생각하고 사회에 공헌하며 지배구조가 투명한지 따져 투자한다는 것이다.

ESG 투자에 불을 지핀 건 보유 자산이 7조달러(약 7700조원)에 달하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회장인 래리 핑크다. 그는 올해 초 전세계 투자 대상 기업의 최고경영자에게 보낸 서한에서 "석탄 화력을 생산·제조하는 기업의 주식을 포트폴리오에서 제외해 팔아버리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그는 기업들에게 "모든 기후변화 행동에 나서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지속불가능한 사업에 대한 투자자들의 분노에 직면해 자산·수익이 훼손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투자자들은 이를 실제 행동에 옮기고 있다. 지난달 미국의 시장조사기관 사회적투자포럼(SIF)은 2018년 초 12조달러였던 미국의 지속가능투자 규모가 17조1000억달러로 증가했다고 밝혔다. 2년 동안 ESG 관련 기업에 대한 투자가 42.5%나 더 몰렸다는 얘기다. 이는 미국에서 관리되는 전체 자산인 51조4000억달러의 33%에 해당한다. 글로벌 자산운용사 UBS도 지난 9월 개인 투자자들에게 'ESG를 모든 투자의 최우선 기준으로 삼으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1990년부터 2019년까지 MSCI KLD 400 지수와 S&P 500 지수 비교. MSCI KLD 400 지수의 수익률이 꾸준히 높다(블랙록 리포트). © 뉴스1
1990년부터 2019년까지 MSCI KLD 400 지수와 S&P 500 지수 비교. MSCI KLD 400 지수의 수익률이 꾸준히 높다(블랙록 리포트). © 뉴스1

이는 일반 기업에 투자하는 것보다 더 나은 수익률로 연결됐다. 금융분석기관 모닝스타에 따르면 최초의 ESG 지수인 MSCI KLD 400 지수의 1990년부터 지난해까지 30년 동안 평균 수익률은 10.7%로, 같은 기간 S&P 500 지수의 상승률(10.2%)보다 높다. 반면 ESG를 하지 않는 기업에 투자하면 오히려 손실을 볼 위험이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에 따르면 2005~2015년 파산한 S&P 500 기업 17곳 중 15곳은 파산 직전 5년 동안 ESG 등급이 하위권이었다. 투자자 입장에선 ESG를 하는 기업에 투자하는 게 더 합리적 선택인 셈이다.

ESG 경영을 통해 기업이 새로운 사업 기회를 만들어 투자를 유치한 사례는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게 친환경 원재료로 의류를 만드는 이탈리아 기업 베제아(Vegea)다. 베제아는 와인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포도씨·껍질 등 폐기물로 가죽과 유사한 직물을 만들어 옷·지갑·구두·가방 등 제품을 제작한다. 이 때문에 소·악어 등 동물들이 해를 입지 않고 가죽 제작 과정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과 막대한 물도 필요없다. 이에 H&M은 올해 상반기 패션쇼에 베제아 제품을 선택했고, 지난해 벤틀리도 신차 인테리어에 베제아의 '포도 가죽'을 썼다.

포도 폐기물로 만든 베제아의 지갑 제품(베제아 인스타그램). © 뉴스1
포도 폐기물로 만든 베제아의 지갑 제품(베제아 인스타그램). © 뉴스1

반면 환경 오염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는 기존의 에너지 기업은 몰락하고 있다. 과거 세계 최대 시가총액을 자랑했던 엑슨모빌은 이제 미국 내에서 50위권에도 들지 못한다. 지난 8월에는 92년 만에 다우존스 산업평균 지수에서 퇴출됐으며, 10월 한때는 신재생에너지 업체 넥스트라에너지에 시가총액이 추월당하기도 했다. 국내 기업도 마찬가지다. 지난 2월 네덜란드공적연금(APG)은 석탄 발전소 프로젝트와 연관된 한국전력의 지분을 매각해 6000만유로(약 800억원)의 투자를 회수했다. 노르웨이 최대 연기금 운용사인 KLP도 지난해 5월 석탄 기반 사업으로 수익을 얻는 OCI의 주식을 전량 매각했다.

기업이 '사회'에 공헌하는지 여부도 투자자들의 결정에 중요한 요소다. 이는 소비자들이 제품의 값어치만 따지지 않고 얼마나 사회에 기여하는지를 보는 흐름에 따른 것이다. 이제 소비자들은 기업의 제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그 제품 품질이 아닌 사회공헌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고, 부족한 기업의 제품·서비스는 외면한다. 투자자 입장에선 소비자의 외면을 받는 기업에 대한 투자는 갑자기 리스크가 발생할 경우 주가가 급락할 가능성이 높아 불안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세계 최고의 유니콘 기업(거대신생기업)으로 꼽히던 미국의 우버(Uber)는 지난 2017년 여직원에 대한 사내 성희롱 사건과 운전사에게 막말을 하는 CEO의 영상이 공개되며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DeleteUber(우버앱을 지워라)' 캠페인으로 20만명 이상이 탈퇴하며 시장점유율이 크게 하락했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대표적인 게 지난 2013년 재고 밀어내기 등 '대리점 갑질' 논란이 불거진 남양유업이 겪은 불매운동이다. 그해 남양유업 매출액은 9.9% 감소했고, 영업이익은 마이너스(-) 174억원을 기록하며 1994년 이후 처음으로 적자로 돌아섰다.

공정이 공개된 에버레인 제조 공장(에버레인 홈페이지). © 뉴스1
공정이 공개된 에버레인 제조 공장(에버레인 홈페이지). © 뉴스1

지배구조와 관련해 '투명한 경영'으로 기회를 얻은 사례도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패션기업 에버레인(Everlane)은 제품 제작 과정에서 드는 비용이 비밀인 다른 기업과 달리 원료·운송비 등 세부 단가와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까지 모든 걸 공개한다. 에버레인의 비전인 '극단적 투명성(radical transparency)'은 합리적인 가격과 윤리적 공정으로 제품을 생산할 수밖에 없게 했고, 고객들의 신뢰는 저절로 따라왔다. 아베크롬비·갭 등 미국의 기존 패션 브랜드는 고전하고 있지만 에버레인은 매년 급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1970년대 주류 경제학자였던 밀턴 프리드먼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돈을 벌어 좋은 물건을 생산하고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반면 국내 최대 기관투자자인 국민연금은 내년부터 ESG 기준을 적용해 국내 주식·채권을 투자할 방침이다. 이젠 돈 보다 지속가능한 기업이 선택을 받는다. 50년이 지난 현대의 기업들은 프리드먼의 말대로 경영을 하면 투자자의 외면을 받는 시대가 됐다.


themo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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