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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여인천하…측천무후①

(서울=뉴스1)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2024-04-08 07:00 송고 | 2024-05-10 18:11 최종수정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당 태종의 실수

당태종 이세민은 중국 역사에서도 눈에 띄는 걸출한 황제였다. 그도 평생에 두 가지 실수를 했다. 고구려 원정의 실패와 무후의 위험성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었다. 무후에게만 뒤집어씌우는 건 미안한 일이고, 여인천하의 위험성을 간과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세민은 탁월한 군사 지도자였고, 리더로서는 무서운 인물이었다. 황후 문덕황후 장손씨는 이세민이 황제도 아니고 황태자도 아닌 시절에 이세민과 결혼했고 평생 조심하면 살았다. 덕분에 드물게 현명한 황후라는 명예를 얻긴 했지만, 무시무시한 남편과 환경 탓에 황후로 권력을 행사할 기회 자체가 없었다.

자신의 경험으로 자신감이 넘쳐서였을까? 아니면 나이 차이가 너무 나고 태종도 나이가 들었던 탓일까? 태종에겐 늦게 얻은 후궁이 한 명 있었다. 성이 무(武)씨이고 이름은 조(照)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당 고조 이연(이세민의 아버지)의 신하로 집안도 괜찮았다. 그녀는 열네 살에 태종의 후궁이 되어 정5품 재인(才人)이 되었다.

태종이 598년생, 무재인은 627년생이다. 30살 차이가 나는 데다가 무재인은 대단한 미인에 총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 과격하고, 매서웠다. 태종은 그녀의 성격을 알았지만, 나이 차이 때문이었는지, 자신감이 넘쳐서 그랬는지 그녀의 위험성을 간과했다.

649년 태종이 사망하자 무재인은 감업사란 사찰로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었다. 태종에게는 아들이 셋이었는데, 황태자 승건은 난폭했다. 둘째 태는 좋은 군주가 될 자질이 있었고, 막내 치는 좀 소심했다. 승건의 폐위보다 중요한 문제가 태와 치 중 누구를 후계로 정하느냐였다. 왕후의 오빠이자 태종의 총신이던 재상 장손무기는 치를 추천했다. 태를 후계로 정하면 분명 승건을 살해하고 황실이 자중지란에 빠질 것이다. 온건한 치가 적임자이다. 여기에는 온건한 황제를 옹립해서 외척과 공신의 힘을 유지하려는 장손무기의 속셈도 있었다.
태종은 평생 사람 잘 보기로 유명했고, 그 덕에 천하를 제패했지만, 자신의 가정사에 관련된 일이 되자 판단이 흐려졌다. 그는 자신이 저질렀던 골육상쟁(태종은 형과 아우를 죽이고, 아버지를 유폐하고 황제가 되었다)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온순한 치를 후계로 채택했다. 그가 고종이다.

고종의 즉위 후에 정계는 장손무기의 구상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태종의 주요 공신들은 살아 있었고, 수말의 전란과 고구려 원정으로 다져진 탄탄한 우애를 과시했다. 고종의 황후 왕씨는 공신집단과 같은 계열인 섬서성 서북 지역의 집안이었다. 공신집단과 유대가 있었는데, 자식을 낳지 못했다. 덕분에 외척은 더욱 약해졌고, 공신집단이 우려할 정도가 아니었다.

고종이 후궁인 소숙비를 총애하자 자식이 없는 왕황후는 고종과 소숙비의 사이를 이간하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고종은 태자 시절에 무재인을 짝사랑했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였다. 눈치 빠르고 야심이 차고 넘치는 무재인이 태자의 관심을 눈치채지 못할 리도 없고, 무시할 리도 없었다. 두 사람의 애정행각이 어느 정도까지 진전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왕황후는 수를 써서 감업사에 살고 있는 무재인이 고종을 만나게 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무재인은 고종의 후궁이 되었고, 왕황후의 총애 아래 황후가 기대했던 역할을 충분히 했다. 그러나 황후는 무재인이 자신까지 노리는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 여황제가 되다

고종의 총애를 받은 무재인은 딸을 낳았다. 왕황후는 총애하는 무재인의 딸을 보기 위해 무재인의 방을 방문했는데, 황후가 나가자 무재인은 딸을 목졸라 죽이고, 고종에게 황후가 나가자마자 아기가 죽었다고 고종에게 말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무재인에게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일 따위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그녀는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이는 또 낳으면 된다."

655년 고종은 지금까지 이미지와 다르게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경하게 밀어붙여서 왕황후를 폐하고 무재인을 황후로 책봉했다. 무후는 황후가 되자마자 폐위된 왕황후와 소숙비를 살해했다. 장손무기도 강제 자살을 명하고 장손씨 집안을 거의 몰살시켰다.

한번 권력을 잡자 무후는 거침이 없었다. 고종의 태자인 이충은 후궁 유씨가 낳은 아들이었는데, 656년에 폐위시키고 자기 아들 이홍으로 대체했다.

무후의 거친 행동에 놀란 고종은 무후를 폐위시키려고 했지만, 정보가 새어 나갔다. 고종이 폐위교서를 쓰고 있는 중에 무후가 방에 들이닥쳤다. 고종은 용서를 빌었고, 무후는 관련자들을 숙청했다.

장손무기 등 태종의 공신집단이 숙청되자 고종은 의지할 권력이 남지 않았다. 무후는 빠르게 조정을 장악해 갔다. 무씨 집안사람을 등용하고, 공신들에게 억눌려 있던 신진 관료를 등용해서 적재적소에 중용했다. 무자비하지만, 사람보다는 눈이 정확하고, 사람을 이용하는 능력을 더 빈틈이 없었다. 태종 이세민의 세 아들은 다 아버지를 닮지 못했는데, 정작 이세민을 빼 닮은 능력자가 무후였다.

능력은 있지만 공신의 견제를 받거나 집안에 하자가 있어서 출세하기 어려웠던 관료들이 무후의 시대에 대거 조정에 진출했다. 영리했던 무후는 이런 신진세력도 두 계통으로 분류했다. 적인걸처럼 충의와 상식을 중시하는 전통 관료와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늑대 같은 관료들이다. 무후는 이 두 집단을 서로 견제하게 하고, 그들의 적성에 맞는 곳에 임명했다. 늑대파의 역할은 감시와 모함, 음모와 배신이었다.

세력을 다진 무후는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신이 수렴청정을 했다. 수렴청정은 보통 태후가 새로 즉위한 아들이 어릴 때에 시행하는 방법이지만, 무후는 남편인 황제를 대신해서 수렴청정을 했다. 660년경부터 고종은 중풍을 앓게 되면서 이제는 정치에 간여하고 싶어도 간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무후는 고종과 함께 두 명의 성인이라는 뜻으로 이성이라고 불렸다. 단어만으로는 두 명의 성인처럼 훌륭한 통치자라는 의미이지만, 실제로는 황제가 두 명이란 뜻인데, 그중 한 명은 폐인이었다.

그래도 측천은 고종에 대해서는 예의를 지키고 존중했다. 남편으로 예우해서인지 자신을 위해서인지는 영원한 미스터리이다. 고종이 죽자 산을 깎아 엄청난 릉을 조성했고, 자신도 죽으면 합장하게 했다. 이것이 건릉인데, 규모상으로는 더 크고 높은 산을 능으로 삼은 당태종의 소릉보다 작지만, 조경과 예술적, 시각적인 면에서는 당나라 최고의 능이다.

◇ 무후의 나라를 세우다

683년 고종이죽자 무후는 거 거칠 것이 없었다. 무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처음에 이충을 폐위하고 세운 이홍은 얼마 뒤에 죽었다. 이홍도 무후가 살해했다는 설이 있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674년에 둘째 이현(李賢)이 태자가 되었다. 이현은 현명했지만, 태자가 되자 긴장을 이겨내지 못했다. 점점 난폭해지고, 무후의 눈 밖에 났다. 고종은 무후의 언니인 한국부인도 총애해서 정을 통했는데, 이현이 한국부인의 아들이란 소문이 돌았다. 당시에는 누구도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일이라 이현은 더욱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모함인지 알 수 없지만 이현은 점점 눈 밖에 났고, 결국 폐위되어 강제 자살을 했다. 그의 묘가 신라 사신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장회태자묘이다.

셋째 이현(李顯)이 태자를 계승했고, 고종이 사망하자 중종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즉위 두 달도 되지 않아 중종은 여릉왕으로 강등되어 쫓겨났다. 장인인 위현종을 등용하려고 한 것이 무후의 분노를 샀다. 자신의 외척을 키우려는 시도를 무후가 용납할 리가 없었다. 중종을 이어 막내인 이단이 예종으로 즉위했다.

예종은 허수아비였고 무후는 자신이 황제로 즉위할 준비를 시작했다. 관제를 바꾸고 수도를 시안에서 뤄양으로 옮겼다. 무씨를 요직에 등용하고, 이 작업에 조금이라도 저해가 되는 자는 죽였다. 마지막으로 친자식인 중종과 예종의 일가, 딸인 태평공주를 제외하고는 생존해 있는 당 황실의 후예를 거의 다 죽였다.

690년 무후는 당나라를 주나라고 개명하고 자신이 황제로 즉위했다. 예종은 다시 황태자가 되고 무씨로 성도 바꾸었다. 사실상 당은 이때 한 번 망했다.

무후는 독재자로 비난받았지만, 그런 비난은 남녀차별에 의한 편견이다. 오히려 무후의 시대에 세상은 번영했다는 반론도 있다. 무후의 치세를 남녀의 문제로 보는 건 오류다. 무후에 가려져서그렇지 무후의 사후에도 위황후가 제2의 무후 직전까지 갔다. 2번이나 여황제가 즉위할 뻔했었던 것은 당나라의 정치 구조에 근본적인 취약점이 있었던 탓이다. 여기에 남편보다 훨씬 유능한 여장부가 황후가 되면서 무후, 위황후, 양귀비로 이어지는 당나라의 여인천하가 열린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뉴스1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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