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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푸시킨이 우크라이나로 유배되지 않았더라면…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2022-04-14 12:00 송고 | 2022-04-15 15:56 최종수정
상트페테르부르크 푸시킨 박물관에 전시중인 푸시킨 자화상. 조성관 작가 제공
 
비행기를 타고 날짜 변경선을 넘어본 지도 여러 해가 되었다. 2020년 2월,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 일본을 여행한 것이 마지막 해외여행이다. 그러나 일본 여행이나 호주 여행은 같은 경도(經度) 선상에서 움직이다 보니 날짜 변경선을 건널 때 느끼는 그 미세한 설렘 같은 것은 맛보기 힘들다.
우리는 북미로 여행할 때 날짜 변경선을 넘는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캄차카반도를 지나 유라시아대륙 끝부분에서 날짜 변경선은 경도를 따라 내려온다. 비행기 앞 좌석에 달린 TV화면을 통해 '비행 루트'를 지켜보는 일은 다른 세상으로 진입하기 위한 예열(豫熱) 과정이다.  

몇 시간 만에 낮과 밤이 바뀌는 것을 인간의 몸은 적응하지 못한다. 시차증(jet lag)이다. 생체 리듬이 바뀐 낮과 밤에 따라가려면 최소 하루 이틀은 걸린다. 시차증은 다른 시간대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료다.      

유럽에 갈 때 비행기는 몽골 초원, 시베리아, 우랄산맥 등을 횡단한다. 불과 150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반경 100㎞를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여객기는 지리적 공간을 마필(馬匹)보다 1000배속의 속도로 이동하면서 낮과 밤을 순식간에 바꿔버린다.
 
© News1 김초희 디자이너
© News1 김초희 디자이너
 
매혹적이고 낭만적인 도시명!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어쩔 수 없이 우크라이나 지도를 하루에 최소 한 두 번씩은 보게 된다. 수도 키이우를 중심으로 마리우폴 등 내륙 지방과 크림반도 주변 지역이다.
나는 러시아는 여행한 일이 있으나 우크라이나 땅을 밟아본 일은 없다. 그런데도 우크라이나, 하면 가보고 싶은 도시가 한 곳 있다.

오데사(Odessa). 키릴 문자로는 Oдeca. 흑해 연안의 항구도시이면서 우크라이나 세 번째로 큰 도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같은 키릴 문자를 쓰지만 읽는 법은 완전히 다르다.

오데사. 내가 이 도시를 기억하는 것은 순전히 지명 때문이다. 발음하기 쉽고 귀에도 잘 들린다. 한글로 표기해도 아름답다. 마치 체코의 프라하(Praha)처럼 도시 이름에서 어떤 향기 같은 게 묻어난다.

내가 오데사라는 도시명을 기억하게 된 것은 아마도 세계지리부도를 이리저리 넘기며 지명을 외우던 중고교 시절이 아닌가 싶다. 대체로 러시아 지명들은 길고 발음하기가 힘들다. 귀에 쏙쏙 들어오지 않으니 잘 외워질 리 없다. 그런데 오데사는 정반대였다. 딱 한번 봤는데 잊히지 않았다. 오데사! 얼마나 매혹적이고 낭만적인가. 다행스럽게도 오데사에는 포연(砲煙)이 자욱하지 않다고 한다.
 
푸시킨이 다닌 귀족학교 리체이가 있는 '차르스코예 셀로'의 푸시킨 기념상. 조성관 작가 제공
푸시킨이 다닌 귀족학교 리체이가 있는 '차르스코예 셀로'의 푸시킨 기념상. 조성관 작가 제공
 
푸시킨 덕분에 알게 된 키이우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기억된 우크라이나 지명은 키이우. 청소년 시절 소피아 로렌 주연의 영화 '해바라기'를 인상적으로 보았지만 그 배경이 우크라이나였다는 사실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우크라이나군이 필사적으로 방어해 내는 키이우! 나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까지 아무 생각 없이 '키예프'라고 읽고 썼다.

내가 키이우를 기억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 덕분이다.

외교관이면서 시인인 푸시킨은 1820년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유배형에 처해진다. 제정 러시아나 소련 시절 정치범들은 대부분 1급 유배지인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푸시킨도 처음에는 시베리아 유형(流刑)이 검토되었다. 하지만 푸시킨의 아버지가 황실에 선처를 요청했고, 이 진언이 받아들여져 시베리아에서 2급 유배지인 '키이우 일대'로 변경된 것이다.

귀족 집안 출신으로 귀족학교 리체이 1기생인 푸시킨은 왜 반역 혐의로 몰렸을까. 귀족 엘리트 학교를 졸업하고 부친의 희망대로 외교관의 길에 들어선 푸시킨. 직업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푸시킨은 시작(詩作)을 계속했다. 그가 1810년대 말, 스무살 언저리에 쓴 시가 '자유'다.

오데사 중심부에 설치된 푸시킨 기념상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자유'가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다. 그런데 이 시를 코란처럼 암송한 그룹이 있었다. 데카브리스트 회원들이다. 데카브리스트는 '12월당'이라는 뜻.

러시아는 1812년 모스크바로 쳐들어온 나폴레옹 군을 패퇴시킨다. 모스크바를 통째로 비워버림으로써 싸우지 않고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쳤다. 일단의 기병 장교들과 코사크 병사들이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를 추격하며 파리로 진격한다. 러시아 장교들은 점령군으로 파리에 머물면서 자유의 공기를 만끽한다.  

파리를 경험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청년 장교들은 달라져 있었다. 차르 전제정치의 폐해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면에서 서유럽에 크게 낙후된 러시아를 발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전제정치를 무너뜨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변화에 대한 열망으로 끓어오른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시가 바로 '자유'였다. 차르의 친위부대는 '자유'를 불온한 시로 규정했고, 시의 원작자가 외무성 직원 푸시킨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푸시킨이 체포된 것이다.
 
'푸가초프 이야기'에 매료되다

시인이 1820년 마차를 바꿔 타며 두 달 이상 걸려 도착한 곳이 러시아 남쪽 끝단 키이우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볼 때 키이우는 까마득히 멀고 먼 남쪽 지방.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기 힘든 유배지였다.

강제로 제국의 수도에서 쫓겨난 푸시킨은 울화통이 치밀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나쁜 면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지역 사령관의 배려로 푸시킨은 오데사, 크림반도 등 우크라이나와 그 주변 지역을 자유롭게 여행하며 새로운 세상에 대해 눈을 떠갔다.

먼저 오데사. 시인은 오데사에서 평생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난다. 오데사 지역 사령관인 백작 부인 안나 케른. 시인은 아름답고 지적인 안나 케른에 반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는 두 사람. 백작 부인은 시인에게 홍옥 반지를 선물한다(시인은 죽을 때까지 홍옥 반지를 끼었다). 두 사람과 관련된 소문이 돌자 급기야 백작은 푸시킨에게 오데사를 떠나라고 명한다. 시인은 홍옥 반지를 모티브로 '부적'이라는 시를 쓰는데, 이 시는 러시아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애시로 평가된다.

오데사를 떠난 시인은 다른 지역을 여행했다. 그러면서 권력의 중심부에선 느낄 수 없었던 변방의 정서를 배웠다. 푸시킨 문학의 금자탑으로 평가되는 '대위의 딸'이 바로 유배 생활 중에 영감을 얻어 쓰였다.

푸가초프 초상화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푸시킨이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시베리아 유형도 어떤 식으로든 푸시킨 문학의 깊이를 심화시켰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그랬다면 '대위의 딸'은 결코 태어나지 못했다. 시인은 러시아 남쪽 변경 지역을 여행하면서 불과 50년 전 있었던 '푸가초프 반란'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 듣는다.

때는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차르에 오른 예카테리나 2세 시절. '야이크 코사크' 지도자 푸가초프(1742~1775)는 농노들을 조직해 반란을 일으켰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푸가초프는 자신을 '죽은 표트르 3세'라고 칭하며 '농노 해방'과 '인두세 폐지'를 내걸고 농노들의 마음을 산다. 코사크인과 농노들이 주축이 된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러시아 남부(카스피해와 흑해 사이 지역)를 장악하고 볼가 지방과 우랄 지방까지 세력을 뻗친다. 하지만 반란은 푸가초프가 1775년 정부군에 의해 처형되면서 막을 내린다.

푸시킨은 푸가초프 반란과 관련된 두 권의 책을 쓴다. 하나는 치밀한 현장 답사와 자료를 바탕으로 논픽션 '푸가초프 반란사'. 다른 하나는 '대위의 딸'이다.

'대위의 딸'의 배경은 앞선 언급한 대로 푸가초프 반란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표트르 그리뇨프. 군에 입대한 그리뇨프가 변방의 작은 요새로 배치된다. 변방의 요새에 근무하던 중 지휘관인 대위의 딸을 연모하게 된다. 여기서 그리뇨프는 역사적 격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그러나 시인은 소설에서 반란군의 편에 서지 않는다. 명분에는 공감하지만 수단의 폭력성에는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주인공 그리뇨프의 입을 빌려 말한다.

"힘과 억압으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다. 최상의, 그리고 가장 간단한 방법은 교육을 통해, 사랑을 가지고 그 덕성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auth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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