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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농사 짓던 47세 만학도 러시아대학 과수석 졸업

영동 공근식씨, 수박농사 짓다 모스크바물리기술대 항공공학과 수석

(충북ㆍ세종=뉴스1) 정민택 기자 | 2016-08-19 14:39 송고 | 2016-08-19 18:24 최종수정

러시아 모스크바 물리기술대학 항공공학과를 과 수석으로 졸업한 공근식씨. © News1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30대 농부가 10여년 후 러시아 모스크바 물리기술대학(MIPT) 항공공학과에서 과 수석으로 졸업했다.

MIPT는 2010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자를 배출하는 등 러시아 최고의 명문대학이다.
국내에선 카이스트가 이 대학과 같은 부류로 분류된다.

이로 인해 충북 영동군에서 수박농사를 짓던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홀로 러시아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공근식씨(47)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귀국,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고 있다.
어렸을 때 공부와는 담 쌓고 지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공씨는 어김없이 도서관을 찾아 전공 분야의 강의를 챙겨보며 시간을 보낸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 같다는 그는 지나가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표현한다.

◇공부가 싫어 농사를 선택한 30대 농부 ‘공부에 눈을 뜨다’

10대 시절 공부가 너무 싫었던 공씨는 충북 옥천고등학교를 다니다 2년만에 자퇴를 하게 된다. 그 당시 공부가 죽을 만큼 싫었다며 차라리 부모님이 짓던 수박농사를 물려 받겠다는 마음으로 학교를 그만뒀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부모님과 별개로 땅을 임대받아 자신만의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치매증상을 보여 어머니와 단둘이 가정을 꾸려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그는 동생 2명의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했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수박농사를 지은 지 20년이 훌쩍 넘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2004년 대전 중구 대흥동에 위치한 성은야학교를 찾아간 공씨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를 준 자원봉사자들을 만나게 된다. 

카이스트 물리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자원봉사자 3명은 그의 공부를 위해 주말에도 시간과 장소 상관없이 수업을 해줬고, 공씨는 하루하루 공부에 재미를 붙여 나갔다. 검정고시를 위한 수업뿐 아니라 물리 등 이공계 영역에 대해 전문 수업을 받은 공씨는 나날이 달라졌다,

이후 고등학교 학위를 검정고시로 취득한 그는 물리에 대해 더 배우고 싶어 배재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공씨는 배재대에서도 또 다른 은사를 만난다. 이 대학 물리학과 박종대 교수는 그의 열정에 반해 카이스트 수업 청강을 추천해줬고, 공씨는 카이스트에서 2년간 수업을 들으며 전문성을 키워갔다. 

또 이 시기에 배재대 화학과 교수인 고려인과 러시아 연구원으로부터 러시아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자연스레 유학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유학에 대한 얘기가 오가던 그때 태풍 루사가 공씨의 비닐하우스를 대파했고 이로 인해 오히려 마음의 부담도 없이 러시아로 떠날 수 있었다.

공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야학교에서 은사를 만나 삶이 바뀌었는데 대학에서도 너무 소중한 인연을 만났다. 내가 인복이 있는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쉽지만 않았던 러시아 유학 한번의 좌절…“노력만이 살길"

러시아 유학길에 오른 공씨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언어의 장벽이었다.

한국에서 러시아 연구원에게 수업을 받기도 했지만, 러시아어를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던 그에게 언어의 장벽은 너무 높았다. 결국 수업을 지도하던 물리학과 교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 한 탓에 그는 중간고사 시험에 응시조차 할 수 없었다.

제적을 당한 그는 더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됐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정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잠시나마 큰 경험을 했다는 마음으로 생활을 했다.”

귀국 후 3개월 뒤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공씨를 다시 흥분하게 만들었다. 이 전화는 러시아 모스크바 물리기술대학교 관계자가 공씨에게 다시 한번 유학올 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학과는 항공공학과로 바꿔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비행기를 타고 러시아로 향했다. 한번의 좌절을 경험한 공씨이기에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강의 내용을 전체 녹음한 뒤 반복 청취하는 복습뿐이었다.

공씨는 잠 자는 시간까지 쪼개며 강의 내용을 계속 들었다. 1학년과 2학년까진 성적이 높게 나오진 않았다. 그러나 그의 노력이 빛을 보는 순간이 찾아왔고, 3학년부터는 성적이 급격하게 오르기 시작해 과 수석이라는 영예를 차지했다.

공씨는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라 쉬지 않았다. 한번의 좌절을 맛 본 터라 또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며 “그룹 수업을 진행하는 러시아 특성상 한 교수에게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데 모든 그룹의 수업을 다 들었다. 모든 강의를 다 녹음한 뒤 쉴 새 없이 들었더니 이 같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고 설명했다.

◇“뒷바라지했던 가족… 이젠 내 뒷바라지를”

“뒷바라지했던 동생들이 이젠 저를 뒷바라지해 주네요.”

공씨는 공부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가족을 최우선으로 뽑는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하겠다는 아들·형을 믿어준 가족. 그에겐 큰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농사를 짓던 당시 뒷바라지를 도맡았던 공씨 덕에 동생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나와 취직도 했다. 이젠 상황이 달라져 늦은 공부를 시작한 공씨를 동생들이 뒷바라지하고 있다. 

가족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받고 있기에 공부를 쉴 수 없었다고 설명한다. 공씨는 각 장학재단을 찾아가며 학비 등을 지원받기 위해 알아봤지만, 나이 제한이 있어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결과를 들으며 가족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러시아에 홀로 있던 그에게 힘이 돼준 이들은 또 있었다. 대전 국방과학연구원들은 러시아로 출장을 오게 되면 공씨를 찾아 식사를 하며 많은 조언을 해줬다. 

공씨는 연구원들이 찾아준 것도 또 하나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무도 알지 못 하는 타국에서 한국인들의 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공씨의 어머니는 이제 공부를 마무리하고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그는 여기서 학업을 마칠 생각이 없다.

그는 “학부를 좋은 성적으로 마무리하니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자신감이 생겼다. 석사과정에서 미사일과 발사체의 초음속 분야를 전공하게 되는데 국내에선 이제 막 시작하는 추세이기에 공부를 마친 뒤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향후 계획을 밝혔다.

이어 “뒤늦게 공부하는 것도 부끄러운데 많은 관심을 가져줘서 부담스럽기도 했다”며 “이로 인해 나같이 늦은 공부를 하려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공근식씨의 대학 성적표. © News1
공근식씨의 대학 성적표. © News1



min777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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