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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온 죄?…'산골소녀 영자'에 달려든 사람들, 비극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연인에서 하루아침에 스타, 곧 이어진 불행의 연속[사건속 오늘]
인간극장으로 이름알려, 강도에 피살된 아버지 재산은 10만원뿐

(서울=뉴스1) 박태훈 선임기자 | 2024-02-09 05:00 송고 | 2024-02-09 08:45 최종수정
 순박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닭을 들고 있는 산골소녀 영자. (SNS 갈무리) © 뉴스1
 순박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닭을 들고 있는 산골소녀 영자. (SNS 갈무리) © 뉴스1

KBS 1TV '인간극장'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다루고 있는 따뜻한 프로그램이다.

2000년 5월 첫 방송을 시작으로 24년 가까운 세월 동안 몇몇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가슴에 남아 있다.

'맨발의 기봉이' '백발의 연인'(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시오 모티브) '달려라 내 아들'(말아톤 모티브) 등과 함께 '산골소녀 영자'도 그중 하나다.
2000년 7월 방영된 '산골소녀 영자'는 폭발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인간극장을 단숨에 인기 프로그램 반열에 올려놓았고 '자연인의 삶'을 동경하는 분위기까지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 첩첩산중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18세 청춘 이영자, 일약 스타로…독이 될 줄이야

23년 전 오늘, 50대 남성 양모씨는 달빛에 의지해 강원 삼척시 신기면의 첩첩산중 사무곡으로 걸어 들어와 흙으로 벽을 쌓아 만든 너와집 앞에 멈춰 섰다.

양씨는 방으로 들어가 딸이 서울로 떠난 뒤 혼자 자고 있던 이씨에게 '돈을 내놓으라'며 흉기를 꺼내 보였다.
이씨가 '살림살이를 보라, 뭔 돈이 있냐'며 거부하자 양씨는 이씨의 왼쪽 어깻죽지를 찌른 뒤 온 집안을 다 뒤졌다.

양씨가 찾은 건 10만원짜리 수표 한장과 현금 2만4000원뿐이었다.
  
양씨는 인간극장의 스타 이영자의 집이 이렇게 돈이 없을 줄 미처 몰랐다.

2000년 7월 인간극장 '산골소녀 영자'는 전기도 안 들어오는 산골에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이영자씨(1982년생)의 사연을 전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순박한 미소, 초등학교를 채 1주일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행복 가득한 그녀, 시인이 되고 싶다는 영자를 본 사람들은 열광했고 후원 문의가 쇄도했다.

급기야 LG텔레콤 CF모델이 됐고 몇몇 사람들은 영자가 제법 돈을 만진 것으로 생각했다. 양씨도 그중 하나.

 영자씨가 아버지와 함께 고향집 앞에서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SNS 갈무리) © 뉴스1
 영자씨가 아버지와 함께 고향집 앞에서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SNS 갈무리) © 뉴스1

◇ 산골 떠나 서울서 초등학교 검정고시 준비하던 영자

인간극장 출연 뒤 많은 사람들은 영자씨의 미소에 반해 책과 후원금을 보내왔다.

영자씨도 '공부를 시켜 주겠다'는 사람을 따라 서울로 와 초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CF에 출연하는 등 나름 바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삼척 산골에서 맛본 그 공기, 그 즐거움, 그 기쁨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부고에 따라 고향으로 내려간 영자씨는 아버지 시신 왼쪽 쇄골에 깊숙한 상처를 발견했다.

처음엔 병사로 처리했던 경찰은 부랴부랴 수사반을 꾸려 살해범 추적에 나서 영자씨 집에서 강탈한 10만원짜리 수표를 노래방에서 사용한 양씨를 강도살해혐의로 체포했다.

◇ 영자씨 후원회장, 모든 수입 가로채…결국 영자씨 다시 산으로

아버지 사망으로 힘들어하던 영자씨 가슴에 대못을 박는 사건이 또 일어났다.

그해 2월 27일 후원회장이 영자씨의 CF출연료, 인세를 가로챈 혐의로 구속된 것. 경찰 조사 결과 후원회장은 수입금을 빼돌렸을 뿐 아니라 영자씨를 윽박질러 '더 많은 돈벌이'에 이용하려 한 사실이 드러났다.
사람과 세상에 상처를 입은 영자씨는 다시 산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고향 부근의 절을 찾은 영자씨는 '도혜'라는 법명을 얻고 불교에 귀의했다.

이어 영자씨는 2002년 4월11일 김천 직지사에서 사미계를 받아 영자가 아닌 '비구니' 도혜 스님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2001년 2월 16일 아버지 장례식에서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영자씨. (MBC 갈무리) © 뉴스1
 2001년 2월 16일 아버지 장례식에서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영자씨. (MBC 갈무리) © 뉴스1

◇ 영자를 세상에 알린 사진 작가 "결국 내가 독…풀처럼 영자는 그 자리에 있었어야"

1999년 가을 '닭을 든 천진난만한 소녀 영자'를 잡지에 소개, 영자씨를 처음 세상에 알렸던 사진작가 이지누씨(1959년~2022년)는 괜히 자신이 끼어들어 영자씨의 행복을 방해했다며 자책하는 글을 남겼다.

글 쓰는 사진작가, 기록 작가로 유명했던 이씨는 한겨레 신문 칼럼을 통해 "영자를 처음 만난 것은 1997년, 영자가 15살 때였다"며 "그 후 서너 번 찾아갔고 그녀가 17살이 되던 1999년 모 잡지에 영자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다"고 했다.

이어 "문제는 그때부터였다"며 "사람에 굶주린 도회지의 사람들은 그 모습에 열광하며 무방비의 그 아이를 소비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영자씨의 인간극장 출연, CF광고, 아버지의 죽음, 다시 산으로 들어가 스님이 된 것이 '사람들이 영자씨를 소비한 때문'으로 본 이지누씨는 "결국 우리들은 그녀에게 독을 선물한 꼴이 되고 말았다"며 "그 빌미를 제공한 사람이 나였다는 생각에 몸 둘 바를 몰라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고 고개 숙였다.

그러면서 "사람이거나 돌 혹은 나무이거나 풀과 같은 것들조차도 제자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영자씨를 풀처럼 삼척 사무곡 고향 집, 그곳에 뒀어야 했는데 자신이 뽑아내 버렸다고 장탄식했다.


buckba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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