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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펜서', 故 다이애나비의 재해석…족쇄를 풀고 나아갈 용기 [시네마 프리뷰]

(서울=뉴스1) 정유진 기자 | 2022-03-09 08:00 송고
'스펜서' 스틸 컷 © 뉴스1
'스펜서' 스틸 컷 © 뉴스1

*영화의 주요 내용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영화 '스펜서'(감독 파블로 라라인)는 1990년대 초, 왕실 가족이 샌드링엄 별장에 모여서 보내는 크리스마스 연휴 3일간 이뤄지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감정 변화에 집중한 영화다. '재키'와 '네루다' 등의 영화로 실존 인물들의 새로운 얼굴을 담아내 호평을 받았던 파블로 라라인 감독이 연출을 맡아 한 인물이 느꼈을 법한 압박과 고통, 극복의 과정을 압축적이고 상징적으로 그려냈다.

영화는 샌드링엄 별장을 향해 가는 다이애나(크리스틴 스튜어트 분)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수행원도 하나 없이 직접 운전을 하는 다이애나는 연신 "길을 잃었다"고 호소하면서 별장 주변을 배회한다. 사실 샌드링엄은 왕실의 별장 뿐 아니라 다이애나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한 장소. 다이애나는 차를 타고 달리던 중 들판 위에서 허수아비 하나를 발견하고 허수아비가 입고 있는 낡은 옷을 꺼내 가지고 온다. 과거 다이애나의 아버지 스펜서 백작은 종종 마을 사람들에게 낡은 옷을 나눠주는 습관이 있었고, 허수아비가 입은 옷은 아버지의 낡은 옷들 중 하나였다.
결국 다이애나는 여왕보다 늦게 도착하고 만다. 왕실 가족들은 별말을 하지 않지만 차가운 시선을 보낸다. 어렵사리 별장에 왔지만, 별장 안에서는 지켜야할 무수한 예절과 관습이 기다리고 있다. 앨버트 대공이 재미로 시작했다는 몸무게 재기 전통을 지킨 후에는 아침과 점심, 저녁 각각의 목적에 맞게 정해준 의상을 입고 모임에 참석해야 한다. 샌드링엄 별장에서는 난방을 하지 않아 모두가 추위에 떠는데 이것 마저 왕실만의 크리스마스 전통이다. 다이애나는 두 아들이자 왕자들인 윌리엄, 해리에게 시제를 설명해주다 문득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 만다. "왕실에는 미래 시제가 없어." 왕실에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과거 시제 뿐이며, 현재까지도 과거에 미리 다 정해놓았기 때문에 과거나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다이애나의 말은 방안을 애처롭게 울린다.

다이애나는 저녁 만찬을 위해 알이 굵은 진주 목걸이를 착용한다. 남편인 찰스 왕세자가 준 선물이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알고 있다. 남편은 자신이 한 목걸이와 똑같은 목걸이를 다른 여자에게도 선물했다. 격식에 맞게 정해진 옷 위에 남편의 부정(不貞)의 증거이기도 한 목걸이를 한 채 만찬에 참석한 다이애나는 어떤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 설상가상인 것은 그런 다이애나에게 유일하게 힘이 되던 존재인 왕실 전용 드레서 매기(샐리 호킨스 분)의 부재다. 갑자기 교체된 의상 담당자 때문에 혼란스럽고, 누군가 가져다 자신의 숙소로 가져다 놓은 앤 볼린의 책을 읽다 앤 볼린의 환상과 마주치기도 하는 다이애나는 자해를 할만큼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인다. 고통에 찬 다이애나는 한밤 중, 이제는 폐가가 돼버린 어린 시절의 생가로 달려간다.

영화에서 다이애나는 왕비의 자리에 올랐지만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 앤 볼린에 비유된다. 그리고 다이애나는 앤 볼린과 끝내 다른 선택을 하며 영화에 의미를 부여한다. 앤 볼린이 이용가치가 다한 후 버림받고 죽음 당했다면, 다이애나는 진주목걸이로 상징되는 왕실 가족으로서의 의무와 체면, 위엄이라는 족쇄를 스스로 풀고 그곳을 도망쳐 나온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헐어버린 집과 낡아버린 아버지의 옷처럼, 평범한 인간 다이애나 스펜서로의 삶 역시 흔적만이 희미하게 남은 상황. 하지만 다이애나는 용감하게 이를 되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두 아들을 차에 태운 채 운전대를 잡고 샌드링엄 별장을 벗어나는 다이애나의 모습이 뭉클함을 주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스펜서' 포스터 © 뉴스1
'스펜서' 포스터 © 뉴스1

야생마 같은 매력을 지닌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다이애나비 역에 캐스팅한 것은 훌륭한 선택이다. 배우가 가진 특유의 야성적인 이미지가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왕실의 문화와 대비돼 영화에 극적인 효과를 부여한다.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본능적 연기로 표현하는 다이애나는 우리에 갇힌 채 자유를 갈망하는 짐승처럼 애처롭고 처절하다. '스펜서'는 생존해 있는 실존 인물들을 모욕하지 않기 위해 주인공인 다이애나 외 다른 왕실 인물들을 부정적이거나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다만, 고레고리 소령(티모시 스폴 분)이라는 보수적인 한 인물을 내세워 왕실 문화의 보수성과 폐쇄성에 대한 적대감을 '점잖게' 표현한다.  

80년대 패션 아이콘인 다이애나비의 이야기를 그린만큼, 영화 속에는 다이애나비의 상징적인 의상들이 여러 벌 등장한다. 대표적으로는 샤넬의 1988년 S/S 오트 쿠튀르에 올랐던 오간자 드레스가 있고, 빨간색 터틀넥 니트와 흑백 체크무늬 치마, 청바지와 샤넬백 등도 눈길을 끈다. 의상을 담당한 재클린 듀런은 영화 '어톤먼트'와 '안나 카레니나' '작은 아씨들' 등의 시대극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유명 스태프다. 전설적 밴드 라디오헤드 출신 작곡가 조니 그린우드가 맡은 음악 역시 특별하다. 왕족들이 등장할 때 나오는 바로크 음악과 다이애나의 신에서 나오는 불안한 재즈 음악은 절묘하게 연결돼 시종일관 영화 속 긴장감을 유지시켜 준다. 러닝 타임 116분. 16일 개봉.



eujenej@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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