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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40주년을 말하다]⑤ 20일 광주역 첫 집단발포…명령자는 누구?

항쟁의 징후…금남로 메운 수만명 시민들
택시운전자 차량 시위…집단발포 5명 사망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 2020-05-05 08:30 송고
편집자주 1980년 5월 한반도 서남권의 중심도시인 광주에서는 한국 현대사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다. 5·18 40주년을 맞아 5·18기념재단이 발간한 '5·18 열흘 간의 항쟁' 등의 자료 등을 토대로 40년 전 비극의 원인과 진행과정, 남은 과제는 무엇인지 되짚어본다.
80년 5월 가톨릭센터 부근에서 차량을 이용해 계엄군과 대치하며  저지선을 밀어붙이는 시민들 자료사진.(박지원 의원실 제공) 2019.11.26 /뉴스1 © News1
80년 5월 가톨릭센터 부근에서 차량을 이용해 계엄군과 대치하며  저지선을 밀어붙이는 시민들 자료사진.(박지원 의원실 제공) 2019.11.26 /뉴스1 © News1

"5월20일은 중대한 날이었다.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살상과 가혹행위가 저질러졌기 때문에 시민들은 극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만일 이날 정부가 공수부대원들의 잘못을 사과하고 철수시켰다면 아마도 더 이상의 피 흘림 없이 문제가 해결됐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서 활동을 하던 미국 선교사 아놀드 피터슨 목사가 기록한 '광주항쟁 현장기록'의 일부다. 피터슨 목사의 증언처럼 5월20일은 '사태 수습'이냐, '전면전'이냐를 가르는 분수령이었다.
밤새 내리던 비는 이날 오전 9시쯤 그쳤다. 시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비를 맞으며 시내 중심가로 몰려들었다.

이날 새벽 두 번째 희생자인 김안부씨(35)의 시신이 광주공원 부근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이 광주 전역에 퍼졌다.

시민들은 어제보다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에도 더 이상 집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신군부는 전날 더 강력하게 진압하라며 추가 파병을 결정함에 따라 병력을 증강했다.

3공수여단 소속 장교 255명과 사병 1137명이 이날 새벽 1시쯤 열차를 이용, 서울 청량리역을 출발해 오전 7시께 광주역에 도착했다. 이로써 광주는 공수부대는 3개 여단 10개 대대 3400여명으로 늘었다. 

전남도교육위원회는 광주의 모든 중고등학교에 임시 휴교 조치를 내렸고 상가는 절반 가량이 문을 닫았다.

오전 10시경 대인시장 주변에 1000여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계엄군의 폭력진압을 성토하며 금남로 방면으로 진출했으나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원들에 밀려 흩어졌다.

10시30분쯤 가톨릭센터 앞에서는 공수부대원들이 30여명의 남녀를 체포해 속옷만 입힌 채 기합을 주고 진압봉으로 폭행하는 모습이 목격됐다. 이 광경을 지켜본 시민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이날 오전엔 한 차례 시위 외에 별다른 사건 없이 소강상태로 지나갔다. 그러나 점심 시간이 지나면서 시위는 다시 격화되기 시작했다.

금남로 인근에는 수만명의 시민이 몰렸다. 시장의 상인들까지 장사를 접고 시위에 참여했다. 시내 곳곳에는 '투사회보'라는 지하유인물이 수천장씩 뿌려졌다.

오후 1시20분경 상업은행 앞에 200여명을 시작으로 2시20분경 충장로 지역에 200~300여명, 전남도청 앞에 200여명, 계림동 지역에 2000여명 등이 모여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3시40분 조흥은행 앞에 200여명, 3시50분경 금남로 2~3가에 5000여명, 금남로 4가에 3000여명이 모였다. 시민들은 점점 더 늘어 오후 4시경에는 수만명으로 불었다.

80년 5월 시위대 진압하는 계엄군 자료사진.(박지원 의원실 제공) 2019.11.26 뉴스1 © News1
80년 5월 시위대 진압하는 계엄군 자료사진.(박지원 의원실 제공) 2019.11.26 뉴스1 © News1

시위대와 군경 사이에 공방전이 계속됐다. 시민들은 잠시 물러났다가 다시 몰려드는 상황이 반복됐다.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은 계속됐다. 그에 맞서 시민들의 저항도 본격화됐다. 시민들의 숫자는 수만명으로 늘었다. 도망치거나 방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차라리 우리 모두를 죽여라"고 외치며 저항했다.

시위대는 현장에서 모금을 통해 스피커를 구입하고 방송단을 조직해 시민들의 투쟁을 독려했다. 도청 앞 광장으로 통하는 도로에는 시민들의 대열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개한 택시운전기사들도 투쟁 대열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택시운전기사들은 멈추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거나 부상자들을 병원에 싣고 간다는 이유로 계엄군에게 공격을 당하는 등 곤욕을 치렀다. 시내버스도 계엄군이 갑자기 들이닥쳐 승객들을 닥치는 대로 구타해 운전기사들도 분개했다.

이날 오후 5시쯤 택시운전사들이 50여대의 영업용 택시를 몰고 광주역에 집결했다. 오후 6시경 무등경기장에서 100여명의 택시운전사들이 다시 모여 군 저지선 돌파와 계엄군을 몰아낼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5~6대의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전조등을 켠 채 경적을 울리며 금남로로 향했다. 엄청난 차량시위 행렬은 교착상태에 빠졌던 시위 군중들에게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오후 7시쯤 일제히 전조등을 켠 200여대의 택시가 금남로에 들어서자 군중들은 환호하며 열광했다. 몇몇 시민들은 차량 안이나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공수부대원들은 도로가의 대형 화분을 쓰러뜨려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저지했다. 그러나 10여대의 차량이 계속 전진하자 차량 저지 특공조를 투입,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며 차량 안의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연행하는 방식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잠시 물러나던 시위대는 오후 7시30분경 공용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온 또다른 시위대와 합류해 계엄군을 압박했다. 공수부대 저지선도 금남로 1가 전일빌딩 앞까지 밀려갔다.

오후 7시45분경 광주문화방송국(MBC) 앞에 모인 5000여명의 시민들은 방송사에 광주 상황을 보도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보도가 되지 않자 8시30분경 방송국 건물에 화염병을 던졌고 9시45분 문화방송 건물은 화염에 휩싸였다.

오후 9시20분경 노동청 앞 오거리에서 돌진하는 시위대의 광주 고속버스에 깔려 경찰 4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시민들은 시간이 지나도 흩어지지 않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공방전은 더욱 치열해졌다.

3공수여단이 방어하고 있던 광주역 부근은 '광주역 전투'로 불릴 정도로 정점을 찍었다. 광주역은 시민들에게 포위 상태였다. 이곳에서도 시위대는 차량을 이용해 공수부대 저지선을 뚫으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궁지에 몰린 계엄군들은 실탄 지급을 요청했다. 최세창 3공수 여단장은 부대원들에게 실탄 지급을 지시했고 실탄을 3공수에 전달했다.

계엄군 첫 사망자도 발생했다. 오후 10시경 11톤 트럭 1대가 광주역 쪽으로 돌진하다 주유소를 들이받고 전복되면서 공수부대 하사관 1명이 깔려 사망했다.

공수부대원 사망 이후 밤 10시30분부터 11시 광주역 일대에서는 요란한 총성이 여러차례 울려퍼졌다. 초기엔 장교들이 권총으로 차량의 타이어를 맞추기 위한 사격이었으나 11시20분쯤 3공수여단 병력이 일제히 발포를 시작했다. 광주항쟁 기간 최초의 집단발포였다.

집단발포로 시위대의 맨 앞줄에 있던 시민들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김재화(25), 김만두(44), 김재수(25), 이북일(28), 허봉(25) 등 5명이 사망했고 6명이 부상을 입었다.

실탄 분배와 발포는 '육군참모총장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사안이다. 하지만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2007년 국방부 과거진상규명위 조사에서 "보고받지 못했다"고 부인하면서 이날 밤 발포 명령을 누가 했는지 책임자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광주역에서 집단 발포 사실이 전해지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시민들은 광주 전역의 파출소를 비롯해 광주소방서, 광주시청, 광주경찰서, 서부경찰서 등을 순차적으로 점거했다.

광주세무서도 불길에 휩싸였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유지되는 군인들이 지키라는 휴전선은 안 지키고 국민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눴다며 분개했다.

집단 발포 후 거센 저항에 부딪힌 3공수여단은 사실상 시위대를 더 이상 막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고 광주역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시민들은 21일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시위를 끝내지 않았다.

광주역 전투에서 최정예부대라는 3공수의 예상치 못한 패퇴에 신군부 지휘부는 큰 혼란에 빠졌다.

계엄사령관은 21일 새벽 4시30분 광주역 발포 상황에 따른 긴급 참모회의를 열고 자위권 발동, 공수부대 외곽철수, 광주 봉쇄 등의 방침을 정해 오전 9시20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21일 오후 2시경 보안사령관 전두환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국방부 장관실에서 '자위권 발동'을 최종 결정했다.(6편에서 계속)


nofatejb@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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