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렛대 잃은 美·시간 쥔 이란…본게임이 시작된다[최종일의 월드 뷰]
- 최종일 선임기자

(서울=뉴스1) 최종일 선임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월 28일 미군에 이란을 상대로 한 '에픽 퓨리'(Epic Fury·장대한 분노) 군사작전 개시를 명령한 지 107일 만에 전쟁이 일단락됐다. 이번 전쟁은 미군과 이스라엘의 대규모 공습, 이란의 미사일·드론 반격, 그리고 헤즈볼라 등 역내 대리세력을 통한 간접 충돌이 중첩되며 전개된 복합전 양상이었다.
여기에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과 제재 압박 등 경제·해상 압박이 결합되면서 글로벌 에너지 시장과 금융시장에도 상당한 충격을 미쳤다. 양국은 지난 14일(미 동부시간, 이란 시간 15일) 종전을 위한 양해각서(MOU) 체결에 합의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17일 이에 공식 서명했다. 이란 대통령 역시 같은 날 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합의 직후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이를 "위대한 합의"로 자평하며 사실상 '승리'를 선언했다. 그는 특히 호르무즈 해협이 재개방되면서 원유 흐름이 정상화되고 미군의 해상 봉쇄도 해제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계 해상 석유 물동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전략 요충지가 정상화된다는 소식에 금융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MOU 4항에 따라 미국은 서명과 동시에 호르무즈 해협 관련 봉쇄 조치를 해제했으며, 이 조치는 이미 이행되고 있다. 이란 반관영 매체들은 지난 16일 이를 확인했다. 이란 측의 해협 봉쇄도 곧 풀리게 된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해협 재개방을 성과로 내세우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전쟁 전 호르무즈 해협은 자유로운 통항이 보장된 곳이었다. 해협 폐쇄 자체가 이번 전쟁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다시 열었다고 해서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 해소된 것도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오히려 상황은 전쟁 이전보다 악화됐다. MOU 5항은 해협의 '무상 통항'을 단 60일로 한정했다. MOU 공개 직후 에스마일 바가이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이란은 향후 호르무즈 해협에서 제공하는 해상 서비스에 대해 수수료(fee)를 부과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제사회의 눈총이 따가운 만큼 60일 이후 실제 결과를 두고봐야 알겠지만 이란은 전에는 없던 '해협 통항 수수료'라는 신규 수익원을 얻을 가능성이 생겼다. 더욱이 이란은 전쟁을 거치며 호르무즈 해협 봉쇄의 실효성을 직접 확인했다. 상시적인 교란 카드를 쥐게 된 셈이다.
승리 선언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핵심 변수인 이란 핵 문제가 진전됐어야 한다. 그러나 해당 의제는 60일 기한(상호 합의 시 연장 가능)의 본협상으로 이관됐을 뿐, 실질 합의는 공백 상태다. 이미 양측은 올해 2월 전쟁 이전에도 세 차례 협상을 진행한 바 있어, 이번 틀은 새로운 돌파구라기보다 기존 협상의 재가동에 가깝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개전 초기 전쟁 목표로 공언했던 탄도미사일 및 핵 역량 파괴, 재래식 군사력 무력화, 역내 대리 세력 지원 차단, 정권 교체 등은 실제 군사 행동으로 일부 이뤄진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주변 걸프국들의 안보 우려를 불식할 정도는 전혀 아니다.
핵 프로그램을 제외한 나머지 미국 측 명분은 향후 본협상에선 다뤄지지도 않는다. 바가이 대변인은 MOU 문안에는 오직 핵 문제와 제재 해제라는 주제에 한해서만 독점적으로 협상한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고 못 박았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본협상에서 핵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한다면, 잃어버린 점수를 딸 수 있다. 하지만 출발부터 전망은 불투명하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경제적 인센티브를 통해 협상을 유도하겠다는 구상이다. 실제로 미국은 서명 직후 해상 봉쇄 해제를 이행했으며, MOU 9항에 따라 본협상 기간 중 추가 제재를 부과하지 않기로 했다. 또 10항에 따라 이란은 추가 협상의 결과로 제재가 해제되기 전이라도 즉각 원유 수출이 가능해졌다.
특히 미국은 핵 문제에 최종 합의하면 이란의 기존 제재를 완전히 없애고 최소 3000억 달러의 재건기금을 운용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 보상책을 얻기 위해, 한 숨을 돌리게 된 이란이 적극적으로 핵 문제 해결에 나설지는 의문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미국 내 강경파들은 이를 두고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민주주의수호재단(FDD)의 미아드 말레키 선임연구원은 "가장 중요한 본협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미국이 핵심 레버리지를 스스로 상당 부분 포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NYT) 역시 미국의 압박 약화가 이란의 협상 지연 유인을 키울 수 있다고 분석했다. 경제적 숨통이 트인 이란 입장에서는 서두를 이유가 줄어들고, 오히려 시간을 전략적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진단도 크게 다르지 않다. 외교협회(CFR) 중동 담당 선임연구원 스티븐 쿡은 "양측이 남은 이견을 좁히지 못한 사례는 과거에도 반복되어 왔다"며 "이란 핵 프로그램 협상은 구조적으로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마이클 래트니 전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미국 대사는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최근 연 웨비나에서 "이란은 핵 협상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는 데 능숙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과거 오바마 행정부의 핵합의(JCPOA) 협상에 약 2년 반이 소요됐고, 바이든 행정부 역시 유사한 기간 동안 합의를 시도했지만 결국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상기시켰다.
그는 "이 문제는 60일이나 120일 안에 해결될 성격이 아니다"며 "이번 합의는 결국 다음 행정부에 복잡한 부담을 떠넘기는 결과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이번 MOU는 '종전'이라는 단기적 정치 치적을 위해 알맹이를 모두 빼버린 외교적 타협에 가깝다. 트럼프 대통령은 호르무즈 해협의 재개방을 앞세워 글로벌 경제를 구한 영웅을 자처하지만, 정작 이란에는 통항 수수료라는 새로운 무기와 버틸 수 있는 경제적 숨통을 열어주었을 뿐이다.
전쟁 이전의 출발선으로 돌아간 핵 협상 테이블에서, 상대로부터 신뢰를 잃고 지렛대를 잃은 미국과 시간을 무기로 쥔 이란의 지루한 공방은, 19일 스위스에서 양측 협상단이 종전 후 첫 회동을 가지면서 이제 막을 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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