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EU, 경제안보·공급망 아우르는 '차세대 전략대화' 출범

자유무역 넘어 디지털·기술안보까지…FTA 협력 구조 고도화
철강 TRQ·CBAM·체코원전 등 통상현안도 '패키지 대응'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2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마로시 셰프초비치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통상·경제안보 집행위원과 면담을 하기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산업통상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5.12.2/뉴스1

(세종=뉴스1) 나혜윤 기자 = 한국과 유럽연합(EU)이 디지털·공급망·경제안보 등 신통상 분야를 포괄하는 '차세대 전략대화(Strategic Dialogue)'를 신설하기로 합의했다.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1~3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을 방문해 마로시 세프초비치 통상·경제안보 집행위원, 보리스 부드카 유럽의회 산업연구위원장 등 유럽연합(EU) 고위 관계자들과 면담을 갖고 기존 FTA 중심 협력의 한계를 넘어 미래지향적 통상 프레임워크로 협력 관계를 고도화하자고 제안했다.

양측은 철강수입규제(TRQ),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체코 원전 FSR 조사 등 주요 현안을 논의하고, 공급망 안정과 기업 예측가능성 제고를 위한 긴밀한 정책 공조에 공감했다.

여 본부장의 이번 방문은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확산과 공급망 재편 등 급변하는 통상 환경 속에서 한국과 EU가 전략적 파트너로서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우리 기업의 EU 시장 진출 애로를 해소하기 위해 마련됐다. 양측은 한국과 EU가 자유무역과 시장경제라는 공동의 가치를 기반으로 긴밀히 협력해 온 점을 높이 평가하고 공급망·디지털·경제안보 분야 협력을 한층 심화해 나가기로 했다.

한-EU는 이번 회담에서 현재의 한-EU FTA 체제가 상품·서비스 교역 중심의 전통적 구조에 머물러 있어 디지털·공급망·경제안보 등 급변하는 통상 환경의 새로운 전략적 이슈를 포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했다. 특히 미·중 패권 경쟁 심화와 신흥 안보 위협 등 글로벌 불확실성 속에서, 기존의 틀을 넘어 협력 구조를 전면적으로 재설계(Reshape)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이에 우리측은 한-EU 협력의 실질적 고도화를 위한 예측 가능한 투자 환경 조성과 신통상 분야 미래 협력 강화를 위한 고위급 교류를 통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협력 성과를 창출해 나가기로 했다. 양측은 이러한 추진 방향을 뒷받침하기 위해 기존 장관급 FTA 무역위를 확대·개편해 내년 상반기 한-EU 차세대 전략대화(Strategic Dialogue on trade, supply chains & technology)를 출범하기로 합의했다.

새로 출범할 전략대화는 경제안보, 공급망, 첨단 기술 이슈를 포괄하는 최상위 전략 협의체로서 단순한 무역 협의를 넘어 기술 패권 경쟁과 복합 위기에 공동 대응하는 핵심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게 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여 본부장은 EU가 철강 세이프가드 종료(내년 6월) 이후 도입을 추진 중인 신규 수입규제와 관련해 우리 업계의 입장과 우려 사항을 전달하기도 했다.

우리측은 한국이 자동차·가전 등 EU 내 주요 산업에 고품질 철강을 공급하며 EU 경제 성장과 고용 창출에 기여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신규 조치가 도입되더라도 한국은 최우선 협상 대상국이 되어야 하며 한국산 철강 수출 물량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TRQ 적용 배제 또는 쿼터 확보 등 각별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EU 측은 한국을 우선 협상대상국으로 고려하고 있으며 한국 기업의 피해를 줄이는 것을 고려하겠다고 언급했다.

배터리 분야에서는 헝가리, 폴란드 등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우리 기업들이 EU 내 첨단 배터리 생산과 공급망 강화의 주역임을 강조하며 이에 상응하는 지원을 촉구했다. 구체적으로 배터리법(Battery Regulation) 후속 이행규정의 조속한 확정, 타 EU 정책(옴니버스 패키지 등)과의 정합성 고려, 에너지 집약 산업(Energy Intensive Industry Sector)에 배터리 분야를 포함해줄 것 등을 요청했다.

보리스 부드카 산업연구위원장은 "유럽 내 배터리 생산 능력의 약 절반이 한국 기업에 의해 구축되었다"며 "사실상 유럽과 한국은 배터리 공급망에서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라고 강조했다. 또 공급망 안정성 강화를 위해 향후 한-EU 공동 생산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며 배터리 공급망 중심의 실질 협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자고 제안했다.

이번 방문에서는 내년 1월 본격 시행을 앞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관련한 의견 교환도 이뤄졌다. 우리 측은 최근 CBAM 본법 개정 과정에서 한국이 제기한 인증서 요건 완화 및 중소업체 면제 기준 신설 등이 반영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양자 소통을 통한 제도 개선 노력에 환영의 뜻을 표했다.

다만 배출량 산정 방식, 검증기관 인정기준 등 핵심 하위규정의 발표가 지연되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무역 불확실성 해소를 위해 관련 규정을 조속히 확정·공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울러 CBAM 적용 대상이 하류재까지 확대될 경우, 공급망 하단부에 위치한 중소기업에 과도한 부담이 전가될 수 있는 점을 우려하며 현행 기본상품(basic goods)에 대한 영향 평가가 충분히 이루어질 때까지 확대 적용을 중지하고 향후 검토 시에도 EU ETS 비대상 공정은 제외하는 등 합리적 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한국과 같이 배출권거래제(K-ETS)를 운영 중인 국가의 경우 이중 규제가 되지 않도록 탄소 가격이 충분히 인정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EU집행위가 한수원의 체코 원전사업 수주 관련 불법 보조금 수령 가능성을 문제 삼아 진행 중인 조사와 관련해서도 우리 정부는 심각한 우려를 명확히 EU 측에 전달했다.

우리 측은 팀코리아의 체코 원전 수주는 공정하고 투명한 공개경쟁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라고 강조하며 시장 원칙에 어긋나는 보조금 지급 사실이 없음을 재확인했다. 이어 EU 측의 신중하고 공정한 처리를 당부하며 조사가 명백히 불공정하거나 불합리한 결과로 이어질 경우 양측 협력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여 본부장은 "이번 브뤼셀 방문이 EU의 신규 철강규제, CBAM, FSR 등 주요 통상현안에 대한 우리 입장을 분명히 전달하고, 배터리·디지털·공급망·경제안보 등 미래지향적 협력 의제를 구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면서 "향후에도 EU와의 고위급·실무급 협의 채널을 적극 활용해 우리 기업의 예측가능성을 제고하고, 자유롭고 공정한 통상환경과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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