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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향한 집념…소떼 몰고 북으로 간 '왕회장' 정주영

故정주영 20주기…'금강산 관광'으로 첫 남북정상회담 초석
"임자 해봤어?" 도전 정신으로 해외진출·조선·자동차 역사 써내려가

(서울=뉴스1) 구교운 기자 | 2021-03-20 06:00 송고
1998년 6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를 끌고 북한으로 향하고 있다. (현대그룹 제공) © 뉴스1

아버지 몰래 소 판 돈 70원을 훔쳐 가출했던 열일곱살 소년 정주영은 현대그룹 명예회장으로서 팔순을 넘긴 1998년 6월16일 소떼 500마리를 이끌고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을 거쳐 평양으로 향했다.

오는 21일 20주기를 맞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남북통일에 관한 의지로 대북사업의 초석을 놓으며 남북경협의 기틀을 다졌고, 남북 화해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정일 만나 금강산관광 실현…첫 남북정상회담 밑거름

정 명예회장은 1989년 1월 기업인으로선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금강산 관광개발 의정서를 체결했다. 하지만 남북 간 긴장상태가 계속되며 실현하지 못했다.

그는 1998년 6월 소떼를 끌고 북한을 방문하며 돌파구를 마련했다. 같은 해 10월 북한을 다시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와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금강산 관광 합의'를 발표했다. 분단 이후 닫혀 있던 북한의 빗장을 열어낸 것이다.

현대그룹은 정 명예회장의 호인 '아산'을 따 현대아산을 만들고 금강산 관광 등 대북사업을 전담하도록 했고, 현대아산은 9000억 넘게 금강산 관광에 투자했다. 1998년 11월 개방된 금강산에는 2008년 7월 박왕자씨 피격 사건 발생으로 관광이 중단될 때까지 관광객 총 195만명이 찾았다.

정 명예회장이 이뤄낸 금강산 관광 사업은 남북간 대화 채널을 유지하도록 했고, 특히 금강산 관광에서 형성된 남북 간 신뢰는 2000년 6월 역사상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는 데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금강산에선 장관급 회담, 적십자 회담, 철도 및 도로 연결 실무협의 등 중요한 당국 회담이 개최됐다.

또 남북 주민 간 이질감을 낮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청소년, 대학생,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의 남북공동행사가 개최됐고 다양한 협력사업의 시발점이 되는 등 민간교류의 장이 됐다. 이산가족 상봉행사도 18차례나 이뤄져 이산가족들의 마음을 달랬다.

◇"임자, 해봤어?"…도전 정신으로 이뤄낸 '한강의 기적'

정 명예회장은 1915년 11월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아산리는 정 명예회장의 아호가 됐다. 현재는 북한 지역이다.

정 명예회장은 19세때 4번째이자 마지막 가출을 한 뒤 쌀가게에서 일하며 주인의 신뢰를 쌓아 가게를 인수, '경일사회'를 설립했다. 사업은 번창했지만 일제가 쌀 배급제를 선포하면서 사업을 접었다.

정 명예회장은 해방 이후인 1946년 4월 서울 중구에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열었다. 현대자동차공업사는 '현대'라는 사명의 뿌리가 됐다. 1950년 1월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세웠다.

불과 5개월 뒤 한국전쟁이 터졌지만 정 명예회장은 전시엔 전시긴급공사를, 전후엔 도로, 항만, 교량 등 사회간접시설 복구사업을 하면서 사업을 키워나갔다.

정 명예회장은 "임자, 해봤어"로 대표되는 도전정신으로 사업을 펼치면서 해방 이후 한국 경제발전을 이끌었다.

1960년대엔 '한강의 기적'의 대표적 상징이자 건국 이래 최대 토목공사였던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주도해 2년5개월 만에 개통시켰다.

태국 고속도로 공사로 해외진출을 시작해 1976년엔 9억4000만달러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했다. 이 공사에 연인원 250만명이 투입되는 등 '20세기 최대의 역사'(役事)로 불릴 만큼 대규모 공사였다. 수주액은 국가 예산의 절반에 해당될 만큼 컸다.

전 세계 조선업계를 주도하고 있는 한국 조선업 역사의 시초에도 정 명예회장이 있었다. 정 명예회장은 1971년 조선소 사업계획서와 울산 미포만 백사장 사진 1장을 들고 차관을 받기 위해 영국으로 향했다. 정 명예회장이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한국 조선 기술의 역사와 우수성을 설명하고 차관 1억달러를 빌리는 데 성공한 것은 이미 유명한 일화다. 그는 조선소가 없음에도 그리스의 세계적 '선박왕'인 리바노스로부터 26만톤급 유조선 2척을 수주하기도 했다.

서산간척지개발 사업이 거센 조수로 난항을 겪자 고철로 쓰려고 구입한둔 20만톤급 폐유조선으로 물길을 막는 일명 '정주영 공법'으로 문제를 해결한 것도 유명하다. 이 유조선공법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져 세계 곳곳에서 문의를 받았다고 한다.

한국 자동차 산업도 주도했다. 정 명예회장은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해 미국 포드사와 계약을 맺고 자동차 조립생산을 맡다가 국산 고유 모델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1975년 국산 고유 모델 1호인 '포니'를 탄생시켰다. 이후 기술 자립 및 신모델 개발해 주력하며 현대자동차가 세계 5위권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정 명예회장은 "정치권을 바로 잡겠다"며 정계에 입문,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14대 총선에서 31석을 얻고 본인도 국회에 입성했다. 같은해 12월 열린 14대 대통령선거에도 출마했지만 16.3% 득표로 3위에 그쳤다.

정 명예회장은 1993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되어 일선에서 물러난 뒤 대북사업에 집중하며 남북교류의 초석을 다지다 2001년 3월21일 향년 86세로 영면에 들었다.


kukoo@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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