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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졸리 로저'가 펄럭이면 그들은 떨었다

잭 스패로와 '캐리비안의 해적'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2020-07-16 12:00 송고 | 2020-07-16 23:00 최종수정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나오는 해적 깃발

얼마 전 석해균 선장 은퇴 기사를 읽었다. 석해균 하면 소말리아 해적과 이국종 교수가 자동 연상된다. 2011년 1월, 삼호주얼리호가 인도양에서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된다. 내 기억으로는 한국 국적의 선박이 인도양에서 피랍된 최초의 사건이다.

우리 정부는 삼호주얼리호 선원 구출 작전인 '아덴만 여명 작전'을 전개했고, 이 과정에서 석해균 선장이 해적의 총 네 발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그는 아주대 의대 이국종 교수의 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고 '아덴만의 영웅'으로 불렸다. 이국종 교수의 책 '골든 아워'에 보면 죽음의 문턱에 걸쳐 있던 석해균 선장을 에어 앰뷸런스로 후송해 수술을 결행하는 절박했던 순간이 생생하게 재현된다.
해군 부사관 출신인 그는 건강을 회복한 2012년부터 해군교육사령부 해군리더십센터 안보교육 교관으로 활동해왔다. 자기 직분에 충실한, 석해균의 행동은 많은 이의 귀감이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아동용 도서로 나오기도 했다.
영화 '캡틴 필립스' 포스터
'캡틴 필립스'의 소말리아 해적

할리우드에는 믿고 보는 몇 명의 배우가 있다. 그중 한 사람이 톰 행크스(1956~)다. 그가 출연한 영화는 어지간해선 실망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중 하나가 2013년에 나온 '캡틴 필립스'다. 실화를 다룬 이 영화를 나는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숨죽이며 시청했다. 배경은 소말리아 해상. 화물선 앨라배마호를 몰고 미국으로 가던 필립스 선장은 해적의 공격을 받는다. 해적이 수시로 출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필립스는 기지를 발휘해 1차 공격을 막아내는 데는 성공한다. 하지만 화물선은 곧 해적에게 점령당한다. 필립스는 선원들을 기관실로 대피시킨 채 홀로 해적의 인질이 된다. 잃을 게 없는 잔인한 해적과 목숨을 건 협상을 벌이는 필립스 선장.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비로소 삼호주얼리호 피랍 상황을 조금이나마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동시에 리더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소말리아 해적! 인도양을 배경으로 활동하는 소말리아 해적은 어느 순간부터 21세기 해적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따금 해적 관련 뉴스를 접하며 우리는 의아해한다. 영화에나 나오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해적이 어떻게 21세기에도 버젓이 여전히 활개를 칠 수 있느냐?
영화 '캡틴 필립스'의 한 장면
영화 '캡틴 필립스'의 한 장면
조니 뎁이 주연한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가 있다. 2003년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캐리비안의 해적-블랙펄의 저주'가 나온 이래 현재까지 모두 다섯 편이 나왔다. '망자의 함' '세상의 끝에서' '낯선 조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매력 넘치는 해적선 선장 잭 스패로로 인해 이 시리즈물은 꾸준하게 흥행에 성공하는 중이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은 카리브해(海)라는 공간에서 전개되지만 시대 배경은 명확히 드러나진 않는다. 다만 몇 가지 추론은 가능하다. 해적선 블랙펄의 선장이던 주인공 잭 스패로가 사실상 업계에서 은퇴하고 조용한 시간을 있다는 상황 설정이다. 제2편 '망자의 한'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해적의 시대는 갔다. 전 세계 바다는 강대국이 점령했다."

이것으로 미뤄 영화는 캐리비안의 해적질이 전성기를 지났을 때가 배경이다. 해적질이 사실상 끝물일 때 이야기다. 

그렇다면 캐리비안의 해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그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콜럼버스가 산타 마리아호를 타고 서인도 제도에 상륙한 게 1492년 11월.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에 이르는 항로를 발견한 이후 카리브해는 스페인의 안마당이나 마찬가지였다. 스페인 상선과 전함이 뻔질나게 드나들며 야금야금 식민지를 건설해나갔다. 아메리고 베스푸치(1454~1512)가 카리브해 남쪽의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는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이 식민지 건설 각축전이 전개된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정의의 집행자이면서 고수익 사업 

카리브해와 대서양의 해적은 17세기부터 시작되었다. 해적은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 건설 경쟁과 해상 무역과 밀접하다. 해적선에 앞서 등장한 게 사략선(私掠船)이다. 정부로부터 적선을 공격해 나포할 권리를 인정받은 무장상선이 사략선이다. 노획물에 대해서는 정해진 비율로 나누는 조건이었다. 한번 사략의 맛을 들이면 수익성 높은 사업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힘들었다. 사략선이 해적선으로 돌변하는 것은 순식간.  

카리브해 해적이 절정을 이룬 시기는 18세기 초반이다. 해적 선원의 숫자가 최대 5000여명에 이를 때도 있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1701~1714) 이후 영국 해군이 해체되면서 선원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일자리를 찾는 선원들이 항구마다 어슬렁거렸다. 바하마 제도가 해적선의 거점이었다. 바하마 제도는 주요 무역항로 근처에 있어 출동에 용이했다.  

해적선 선원들은 100% 전직 선원들이다. 상선 선원, 해군 수병, 사략선 선원 등 거친 바다생활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 전직 상선 선원이 압도적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해적선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해적을 자원했다. 1718년, 영국 해군의 벤저민 베넷 대령은 본국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붙잡히면 그들에게 가담하는 자들이 너무 많아서 머지않아 해적들이 몇 배로 불어날까 두렵습니다."

왜 상선 선원들은 해적질에 거침없이 뛰어들었을까. 한마디로 수입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해적선에서는 노획물이 기술과 직무에 따라 균등하게 배분되었다. 해적선 선원들은 최하층 출신이라는 동류의식과 위험을 공유한다는 동업자 의식이 강했다. 이것이 독특한 형제애로 발전했다. 상명하복의 무조건적인 권위주의 질서가 해적선에선 통하지 않았다. 나름의 평등주의가 실천되고 있었다. 

해적 선원들은 스스로를 로빈 후드, 즉 정의의 집행자라고 여겼다. 비열하고 잔인한 선장에 대해 복수하려 해적질을 한다는 신념을 공유했다. 상선을 나포한 다음 선원들에 선장에 대한 평가를 듣는다. 만일 선장이 야만적으로 선원들을 대했다는 증언이 나오면 그 선장은 끔찍한 고문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드물게 인격적인 선장은 목숨을 건졌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속의 해적선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속의 해적선
해적선의 상징이 해골과 뼈다귀가 그려진 졸리 로저(Jolly Roger)다. '염라대왕의 깃발'로 통하는 졸리 로저가 마스트에 올라가면 상선의 선장과 선원들은 얼어붙었다. 특히 악행을 일삼은 선장에게 펄럭이는 졸리 로저는 곧 묵시적 사형선고였다. 

인도양의 해적은 역사와 전통에서 대서양이나 카리브해의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해적 이야기가 제법 나온다. 마르코 폴로는 24년 만에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올 때는 중국 범선을 이용했다. 마르코 일행은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연안과 인도 남동부를 거친 뒤 인도양을 건너 호르무즈에 닻을 내렸다. 

그는 인도와 인도양을 여행하며 해적선 이야기를 듣고 목격했다. 13세기 인도 서부의 항구들은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에서 온 상선들로 북적였다. 무역선들이 값비싼 물품들을 싣고 돌아갈 때 해적선들이 공격했다. '동방견문록'에 따르면 해적선은 약 8㎞ 간격을 두고 다니며 합동작전을 폈다. 20척의 배로 160㎞의 바닷길을 완전히 장악했다. '동방견문록' 속으로 들어가 본다.

"상선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불을 피워 다른 해적선에 알린다. 그 때문에 어떤 배도 들키지 않은 채 이 지역을 통과할 수 없다." "해적들은 모든 물건을 빼앗아가지만, 사람을 해치지는 않는다. 그들은 '가서 다른 물건으로 장사해라. 그래야 우리가 또 털 수 있을 테니까'라고 말한다." "요즘 해적들은 더 악랄해졌다. 이 해적들은 상인을 붙잡으면 타마린드를 바닷물에 타서 마시라고 한다. 그러면 상인들은 엄청나게 배 속에 있는 것을 모두 배설해낸다. 해적들은 상인들이 설사한 것들을 모두 모아서 그 안에 진주나 보석이 있는지 수색시킨다."     

해적은 기반이 취약하다. 해적은 스스로 생산하는 경제공동체가 아니다. 가정도 없고 영토도 없고 국가도 없다. 지리적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카리브해를 배경으로 한때 번성한 것은 이 바다에 무인도 같은 섬들이 많았던 까닭이다. 

그렇다면 21세기 인도양에서 활개를 치는 소말리아 해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소말리아가 사실상 국가 기능을 상실한 채 17~18세기 카리브해의 바하마 제도처럼 해적의 소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영화 '캡틴 필립스'에서 소말리아 해적들은 집이 있고 가정이 있다. 소말리아에서는 해적보다 고수익 직업을 찾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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