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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활동 ‘초산 김상윤’ 선생의 짧고 치열한 삶

(부산=뉴스1) 김민경 기자 | 2016-02-29 17:27 송고 | 2016-03-02 08:25 최종수정
초산 김상윤 선생© News1DB
초산 김상윤 선생© News1DB
"드러나지 않은 독립열사들의 삶. 문중에 맡겨야 하나, 국가가 나서야 하나."

1919년 3·1운동은 조국 독립에 대한 우리 민족의 확고한 뜻을 전 세계에 알리는 성공적인 계기였다. 동시에 일본이 헌병의 총검으로 감시망 더 죄어오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1920년대 독립운동은 무력을 앞세우며 더 비밀리에 행해졌다. 당시 일본이 가장 두려워 했던 단체가 바로 의열단이다.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의열단 독립열사 대부분은 무력투쟁의 선두에 서서 공격을 감행한 이들이다. 
    
그러나 의열단이 용맹을 떨치며 독립운동을 펼 수 있었던 이유는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조직을 관리하며 독립운동의 효과를 극대화시킨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핵심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김상윤 선생이다.
    
◇의열단 5인 지도요원 ‘초산 김상윤’ 선생  
의열단 창립 단원인 김상윤 선생은 의열단의 모든 거사를 계획하고 실행을 지휘, 대외 교섭, 자금 관리를 총괄하는 의열단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5인 참모부의 일원이었다. 
    
대구대학교 김영범 교수의 의열단 연구를 시작으로 동아대 전성현교수의 논문과 약산 김원봉, 이종암전 등의 서적에서 토막토막 밝혀지고 있는 김상윤 선생의 행적을 통해 그가 1920년부터 7년 동안 의열단 집단지도체제를 이끈 중요한 인물이었음이 확인됐다.
    
1897년 9월 12일 밀양군 상남면 기산리에서 5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난 초산 선생은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을강 전홍표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사립 동화학교를 거쳐 서울의 중앙학교를 졸업했다.
    
“미래는 너희들의 것이다. 너희들이 분기하지 않고 대체 누가 조국 광복의 대업을 이룰 것이랴?” 
    
그에게 철저한 배일사상을 고취해 준 이는 바로 동화중학교 전홍표 교장이었다. 전 교장 늘 일본과의 투쟁을 단 하루라도 게을리 할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하며, 동화학교 출신의 청년들은 대거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1917년 조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지 않고는 그들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스무 살의 김상윤 선생은 투쟁 방안을 모색하며 만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3·1 만세운동을 목격하며 무력수단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결론에 닿은 그는 중국 길림에 있는 신흥 무관학교로 향했다.
    
그 해 11월 10일. 길림시 파호문 밖 57번지에서 김원봉·윤세주·한봉근·한봉인·이성우·곽경·강세우·이종암·신철휴·배동선·서상락·권준 등 신흥무관학교에서 만난 13명의 청년들이 항일 무력투쟁단체를 결성했다. 

그들은 ‘정의’의 의(義)와 맹렬의 열(熱)을 취해 단체 이름을 의열단이라 명명했다. 
    
◇창립 단원 13인 중 단 한번도 체포된 적 없는 1인 
    
“김상윤은 김옥(金玉), 김옥(金鈺), 김옥산, 김진정 등 6개의 이명을 쓰는 조선인이며, 출신은 양반이다.…중국으로 망명, 현 소재는 불명(不明)이며 열렬한 의열단 간부이다”
-‘조선총독부 경무국보고’ 中
    
김상윤 선생은 13인의 의열단 초기 단원 중 일본의 감시망에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1919년 의열단을 창단한 후 7년 동안 16번의 폭탄 투척으로 항일 투쟁을 벌였다.      
    
1920년 김상윤 선생은 의열단의 제1차 의거인 ‘밀양폭탄사건’에서 황상규, 윤세주와 함께 국내에서 자금책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배신자의 밀고로 활동하던 동지들이 체포되고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엄중한 경계망을 뚫고 상해로 탈출해 약산 김원봉과 다시 합류했다.
    
최수봉을 만나 의열단 가입을 권유한 것도 그였다. 같은 해 12월 27일 일어난 최수봉 의사의 ‘밀양경찰서폭탄사건’의 배후 인물로 밝혀져 수배되기도 했으나 체포되지 않았다.
    
상하이 황포탄에서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 등이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기이치(田中義一)를 저격하고자 할 때에도 의사 결정에 깊이 관여했다. 
    
김원봉 단장과 초산선생 등 5인 참모회의 집단지도체제 하에 1920년부터 1925년까지 6년 동안 일본의 고위층을 겨냥한 수많은 무력투쟁은 모두 의열단의 거사였다.
    
일본 경찰은 물론 육군성 전체가 의열단 독립투사를 잡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많은 투사들이 체포구금 됐지만, 김 선생은 기막힌 변장술과 신출귀몰한 피신술로 늘 본진으로 회귀해 조직의 지도부 역할을 톡톡히 했다. 동지들은 그런 그를 두고 초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의열단의 단원확보와 조직체계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지만, 창단 13명이 길림에서 시작해 22년 북경에서 세를 키워 단원을 확충하는 데는 초산 선생과 김대지 선생의 역할이 컸다. 

의열단이 결성된 초기 단계가 지나고 수 백 건의 활약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그 존재가 뚜렷해지자 단원이 되기 소망하는 사람은 점차 늘었다. 
조선의 젊은이들은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는 활동임에도 조국독립을 염원하는 마음 하나로 10대 1의 의열단 경쟁도 마다하지 않고 단원에 지원했다. 비밀결사 조직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억지로 세를 줄어야할 정도였다.      
    
일제기관은 1924년의 ‘정예단원’을 70여 명으로 기록했다. 최근 의열단의 독립활동에 대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도쿄 등 해외 각지에서 비밀리에 활동한 이들의 수까지 모두 더하면 의열단 활동을 한 이들은 천여 명을 훌쩍 넘긴다는 분석이 나온다. 
    
1926년 1월 단장이었던 약산이 의열단 활동을 일시 중단하고 군사교육을 받기 위하여 황포 섬에 있는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겠다는 제안에 강하게 만류했던 이 또한 초산 선생이었다.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의열단 간부 다수가 군관학교에 들어가면서 조직이 해체되자, 초산 선생은 중국 남부 하문에서 머물다가 복건성 천주에 있던 설봉사로 들어갔다.
    
1927년 10월 19일 이 절에서 31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는 소문만 전해질 뿐, 선생의 이후 행적에 대하여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25년부터 숨을 거두는 날까지 아나키스트운동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정부는 이런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31세의 젊은 나이로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그의 삶은 시간 속에 갇혀 기억해주는 이는 없었다,     

그의 행적을 쫓기 시작한 건 조국이 아닌 선생의 손자들이었다. 

1995년 6월 그들은 직접 설봉사 현지를 찾아갔으나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 설봉사는 무참히 파괴되어 초산 선생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2005년 6월 11일에는 선생의 출생지인 밀양시 상남면 기산리 마을 입구에 각계의 정성을 모아 세워진 이 기념비만이 후세들에게 민족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일깨우고 있다. 

초산 선생의 손자인 김기우 전 부산대 교수는 “70년을 살면서 정치학을 공부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에 일생을 바친 조부님 앞에선 항상 부끄럽다”며 “조부님뿐만 아니라 수많은 열사들의 훌륭한 공적이 가려져 있는데 앞으로 국가가 나서서 이들의 공적을 연구하고 그 분들의 뜻과 정신을 이어받아야 국가도 발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tmk8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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