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준의 나고야~호] 일본에서 '시간표'를 믿지 않게 될 줄이야
- 안영준 기자

(나고야=뉴스1) 안영준 기자 = 약 3주 동안 일본 나고야에 머물며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을 취재하는 동안 믿지 못하게 된 것이 있다. 바로 대회 셔틀버스 시간표다.
일본은 정시성의 민족으로 꼽힌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전 10시가 오픈인 식당은 오전 9시 59분에서 1분이 더 지나기 전까진 절대 '오픈' 푯말로 뒤집지 않는다. 라스트 오더 오후 9시 30분에서 1초가 지나면, 아무리 비굴한 표정으로 주문을 요청해도 불가능하다. '약속'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미디어 버스 시간표는 굉장히 유연하다. 버스가 있다고 하면 없고, 없다고 하면 있고, 10분 후 온다는 버스는 50분이 걸려도 오지 않는다.
이번 대회에서 버스 배차 문제는 이미 많이 보도됐다.
결승전 당일 선수들을 태울 버스조차 제때 안 오고, 축구 대표팀을 야구장으로 데려가는 대회인데 미디어 버스가 오지 않는 것쯤이야 기삿거리도 아니다.
하지만 선수들처럼, 현장에서 또 하나의 '경기'를 치르는 기자들에게도 이는 꽤 심각한 일이었다.
이동의 '생명줄'인 미디어 버스가 '고무줄'처럼 제멋대로 움직이는 게 늘 불안하고 괴로웠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밤, 주변엔 아무것도 없는 코마키 아레나 배구장에선 그날의 미디어 버스 '막차'가 제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구조'를 기다리는 각국 기자 20여 명이 칠흑 같은 밤 우산을 쓰고 주차장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은 흡사 자연재해 현장이었다.
한국 기자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며, 아스팔트 위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한 손으로 노트북을 펴서 타닥타닥 글자를 완성해 나갔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이 키보드 위로 떨어져 오타로 범벅됐다.
이곳을 찾아오다 길을 잃었다는 버스는 '제발 와 주기만 해'라는 해탈의 감정이 들 때쯤 비상등을 켜고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숙소로 돌아갈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에 행복했다. 버스의 노란 라이트가 이번 대회에서 봤던 그 어떤 금메달만큼이나 밝고 영롱했다.
"일본 전역에서 버스 기사들을 모집하다 보니 일부는 나고야 지리를 잘 모른다. 그리고 수요에 비해 버스 숫자가 부족한 구조적 한계도 있다"고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던 일본 기자는 다음 날 "아시안게임 수준에 맞지 않는 사고로 한국 기자들이 분노했다"고 보도했다.
말이 안 통해도 다 느껴졌나 보다.
근대5종이 열린 안조 스타디움에선 더 황당한 일도 있었다. 막차 버스 시간을 안내받고 미디어 센터를 나와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갔는데, 관계자가 버스는 이제 더 없단다.
그날도 천이 범람할 만큼 많은 비가 쏟아진 날이었는데, 버스가 없으면 인근 지하철역까지 약 한 시간을 산 넘고 물 건너 '근대 2종'을 해야 할 판이었다.
혹시 몰라 20여 분을 기다렸더니, 이제 버스는 없다고 했던 관계자의 주차 유도를 받으며 미디어 버스 막차가 들어왔다.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지 지금도 아찔하다. 귀가를 운에 맡겨야 한다.
물론 모든 버스가 말썽인 건 아니다. 많은 이들의 노력과 고생을 연료로 제때 오는 버스도 많다.
하지만 기자마다 일련의 사고들이 축적된 이후, 한국 기자들은 시간표를 믿지 않기에 이르렀다.
오후 9시에 출발하는 버스가 있다면 오후 8시 30분부터 셔틀버스 정류장 근처엔 한국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심지어 그게 효과가 있었다. 버스는 오후 8시 40분에 와서 훌쩍 떠나기도 했다. 그날, 버스 시간표를 '안 믿어야 한다는 믿음'에 확신이 섰다.
그로 인해 얻은 긍정적 효과도 있다. 늘 미리 대응하면서 부지런해졌다.
또한 작은 일, 예를 들면 제때 버스가 와서 계획했던 대로 이동할 수 있는 평범한 상황에서 이전보다 큰 행복과 만족감을 느끼게 됐다. 한 동료 기자는 버스가 5~10분 정도 늦는 일은 그냥 웃어넘긴단다.
농구 국가대표 이현중은 금메달을 딴 뒤 "버스가 안 오는 건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문제다. 속으로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죽여버린다'는 마음을 먹지만, 그 불씨만 살리고 감정적 대응은 하지 않으려 했다"고 멋진 말을 했는데 그 정신이 한국 기자들에게도 전해졌다.
기자들도 시간표에 속지 않도록 불씨는 살리면서, 감정적 대응은 하지 않고 각자의 방법대로 열심히 미디어 버스를 타고 다니고 있다.
이제 대회는 어느덧 막바지에 돌입했다.
마지막까지 우리 선수들이 어떤 멋진 경기를 펼칠지 궁금하면서, 동시에 마지막엔 버스가 몇 대나 제시간에 올지 궁금하다. 이번 대회를 관통하는 두 개의 궁금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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