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정조의 격쟁(擊錚)과 이 대통령의 현장 미팅
(서울=뉴스1) 최경환 정치부 부국장 = 정조시대 전라도 흑산도에 사는 김이수라는 사람이 서울까지 올라와 임금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흑산도는 목포에서 87㎞ 떨어진 외딴섬이다. 지금도 쾌속선으로 3시간 30분이 걸린다. 김이수가 한양까지 먼 길을 무릅쓴 것은 종이 상납을 폐지해달라는 민원 때문이다.
흑산도는 종이 원재료인 닥나무 산지였다. 그러나 당시 닥나무가 멸종돼 흑산도 주민들은 닥나무 껍질 대신 세금을 내야 했다.
김이수는 정조의 어가가 노량진에 이르렀을 때 꽹과리를 쳐 임금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했다. 일개 평민이 임금의 행차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격쟁(擊錚)'이라는 제도가 있어 가능했다. 격쟁은 왕의 행차 중 억울한 백성이 징이나 꽹과리를 쳐 이목을 집중시키면 왕이 그 사연을 듣도록 한 제도다. 정조는 이 제도를 가장 활성화한 왕이다. 재위 25년(1776~1800년) 동안 격쟁이 1335건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선거 때나 당선 이후에도 정조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는 지난 7월 31일 장차관 워크숍에서 "똑같은 조선인데 선조 때는 수백만 명이 죽음에 내몰리고 정조 때는 동아시아 최대의 부흥을 이끌어 냈다"고 했다. 정조가 한 여러 일 중 이 대통령이 가장 잘한 일로 꼽은 것이 바로 격쟁이다. 이 대통령은 "전남 강진의 사또가 뭔 짓을 하는지 알 수 없는데 탐학질을 확실하게 막는 방법을 정조가 개발했다"며 "징을 들고 다니면서 억울한 백성은 와서 징을 쳐라. 어떤 백성이 징을 치는 날 그 고을 사또가 경을 치는 날"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정조가 이 격쟁 제도를 활용해 당쟁이 극심했던 당시 관료사회를 다스릴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대통령이 취임 후 지방에 내려가 민원을 듣는 타운홀 미팅이나 산업재해 발생 사업장을 직접 찾는 일들은 정조의 격쟁을 떠올리게 한다. 최고 통치권자가 현장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7월 25일 경기 시흥 SPC삼립 시화공장을 찾았다. 대통령은 이 회사 대표에게 "12시간 맞교대하면 산재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예측되는데 고치지 않는 건 비용 때문 아니냐"고 지적했다. "월급을 300만원 받는다고 목숨값이 300만원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배석한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장시간 노동 실태를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이 대통령은 우리 사회 '죽음'의 문제에 진심으로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재임 기간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고 싶어 한다고 참모들에게 자주 말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정조의 격쟁 장려를 높이 평가한 이재명 대통령은 정조가 격쟁 이후 처리 과정을 더 중시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정조는 격쟁의 내용과 처분 결과를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하루하루를 되돌아본 기록이라는 의미다.
흑산도 사람 김이수의 격쟁을 들은 정조는 종이 세금을 영원히 혁파하도록 했다. 구체적인 대안은 좌의정 채제공이 입안했다. 세수가 줄어드니 고을 관리들은 김이수의 격쟁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정조는 백성의 편을 들었다. '손상익하(損上益下)' 위가 손해보고 아래가 이득이 되게 하는 것이 나라가 할 일이라는 원칙도 제시했다.
산재 사망을 줄이라는 이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SPC 현장 방문 며칠 후 포스코이앤씨 공사장에서 또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이후에도 하루가 멀다하고 일터의 사망 뉴스는 이어지고 있다.
지난 19일에는 철도 노동자 2명이 열차에 치여 목숨을 잃고 5명이 다쳤다. 김 장관 자신이 철도 기관사 출신이다. 철로 작업의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기관사로 근무하는 동안 이 작업의 문제점은 지속 제기돼 왔다. 노조위원장으로서 관심 갖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노동자는 희생되고 있다.
대통령이 현장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관리들을 긴장하게 만든다. 관리들은 통치자의 의중을 파악해 단기에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에 내몰리게 된다. 그러나 한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점은 일거에 해결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눈에 보이는 일차적 원인을 제거하고 잘못한 사람 몇 명 처벌한다고 끝이 아니다. 문제가 발생한 원인이 여러 가지고, 얽혀 있는 이해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원인에 정확히 맞는 대책을 찾아 합리적인 처방을 내는 것이 공직자의 능력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일본과 미국 순방 이후 타운홀 미팅을 재개한다고 한다. 현장과 직접 소통하는 대통령 뒤에 관료들의 문제 해결 능력이 든든하게 받쳐주기를 기대한다. "백성이 징을 치는 날, 관리들이 경을 치게 되는 일"은 국민들도 바라지 않는다.
NKHCHOI@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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