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옥수수 대신 밀을 선택한 이유는?[정창현의 북한읽기]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

편집자주 ...북한 정치·군사·사회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함께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등 북한 수뇌부에 대한 '리더십 해석'을 통해 반 발짝 앞서 북한의 변화를 읽어낸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은 서울대 대학원(국사학과)을 마치고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 전문기자를 거쳐 국민대·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국가기록원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2019년 평양 대성백화점 1층 슈퍼마켓 식료품매장에서 팔리는 빵과 과자 제품들.(필자 제공)

북한은 지난 9일부터 11일까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13차 전원회의 확대회의를 개최해 올해 당·국가 사업을 총화(결산)하고 내년 제9차 당 대회 준비 방향을 확정했다.

이 회의에서 김정은 당 총비서는 구체적 수치를 거론하지 않았지만 2021년 당 제8차 대회에서 확정한 5개년 국가경제 발전 계획이 완수됐다며 농업부문에서 지난해보다 높은 알곡(곡물) 수확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그는 내년 국가적 중점 과제로 농업·농촌부문 개편을 최우선으로 강조하며 밀 재배 면적 대폭 확대와 밀 가공 능력 증대를 내세웠다.

북한은 8차 당 대회를 기점으로 옥수수와 감자 대신 밀·보리 재배 면적을 확대하고 있다. 김 총비서는 2021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5차 회의 시정연설에서 "전국적으로 밀, 보리 파종 면적을 2배 이상으로 보장"하라며 구체적 목표를 제시했다. 인민의 식생활 문화를 흰쌀밥과 밀가루 음식 위주로 바꾸겠다는 구상이다. 실제로 북한 통계로 보면 2022년에 비해 2024년에는 밀, 보리 재배면적이 3만 5600여 정보(1억 680만 평) 늘어났고, 밀 수확량도 많이 늘어났다.

북한이 옥수수를 대체하는 대안 작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김정일 시대 초기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8년 10월 양강도 대홍단군을 현지지도하면서 "감자는 흰 쌀과 같다"며 감자농사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킬 것을 강조했다. 2001년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김 위원장은 "러시아는 감자를 주식으로 활용하는 좋은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 나 역시 조선에 감자를 주식으로 정착시키고 싶지만 아직 잘 실행되지 않고 있다"며 감자 생산량을 3배 정도 높일 구상을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구상은 쌀·옥수수와 함께 감자를 제3의 주식물로 삼아 식량난을 해소하려는 시도였다. 이를 계기로 대대적인 감자 증산운동이 펼쳐졌고, 재배 면적도 1998년 4만 정보(1정보=4000평)에서 2000년 20만여 정보로 확대됐다. 2003년 북한 농업과학원은 감자 생산량을 800만 톤 수준으로 높여 식량난을 해결하겠다는 거창한 목표까지 내세웠다.

북한이 갑자기 옥수수 대신 감자를 주식으로 내세우기 시작한 것은 옥수수 증산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평가 외에도 주민들의 옥수수밥 기피 현상을 고려한 것이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2001년 "우리 인민들은 지난 45~50년간 주로 옥수수를 먹어 왔다. 이미 많은 이들이 옥수수를 지겨워하고 있다"라며 곤혹스러운 속내를 털어놓은 바 있다.

옥수수를 감자로 대체하는 '감자혁명'을 내세운 북한은 감자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감자요리경연대회도 열고, 감자국수 등 다양한 요리를 선보였다. 김정은 총비서도 2016년에 백두산 인근 삼지연군에 감자가루 생산공장을 건설하고, 여러 차례 이곳을 방문해 생산과 개발을 독려했다. 그러나 전체 곡류 생산에서 감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10% 내외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주민들이 구황작물로 여겨온 감자를 주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2007년 한국은행 금융연구원이 1997~99년 탈북자 103명과 2004~2006년 탈북자 116명을 비교·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북한 주민의 주식은 1990년대 후반에는 쌀·옥수수·감자가 19:44:33의 비율이었으나, 2000년대 중반에는 45:34:17로 나타났다.

북한 당국의 의도와 달리 쌀 섭취가 크게 늘면서 오히려 감자와 옥수수 소비가 줄어든 것으로, 옥수수 대신 감자의 주식 비중을 높이려는 북한 당국의 정책이 실패한 것이다. 2002년 이후 북한 전역의 '구역시장'이 합법화되면서 시장활동이 늘어났고 여기서 돈을 벌 주민들이 옥수수나 감자보다 쌀을 구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평양시민들이 대형 슈퍼마켓인 '광복지구상업중심' 식료품매장에서 빵을 고르고 있다.(필자 제공)

아울러 실생활에서 빵을 비롯한 밀가루 제품 소비도 늘어났다. 1990년대 북한 식량난이 심각할 때 한국의 인도적 지원단체와 국제기구는 대대적으로 빵공장 건설과 밀가루 지원사업을 펼쳤다. 당연히 어린이를 중심으로 빵 소비가 늘었다. 이후 중국과의 교류를 확대하면서 밀제품의 소비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지방의 시장에서도 중국에서 들여온 라면이나 과자 같은 밀 가공식품들이 널리 유통되기 시작했다.

북한의 식료공장들에서도 밀가루제품 생산을 늘렸다. 실제로 2008년 5월 평양의 식료품공장을 방문했을 때 공장의 한편에는 중국에서 수입한 밀가루가 쌓여 있었고, 다양한 빵을 생산해 학교와 상점에 제공하고 있었다. 지난 2012년 문을 연 첫 대형 슈퍼마켓인 평양 광복지구상업중심(옛 광복백화점)을 비롯해 대성백화점 1층 슈퍼마켓, 주요 종합상점들의 식료품매장에서는 평양밀가루가공공장, 금성식료품공장, 금컵체육인종합식료공장 등에서 생산한 빵과 과자 등 밀을 원료로 한 제품이 판매되고 있다.

선대가 옥수수와 감자로 해결하지 못한 식량문제를 밀 생산을 높여 풀겠다는 김정은 총비서의 구상은 기후변화 대응과 기술적 측면에서 현명한 정책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옥수수는 비료 투하량이 많은 작물이고 자연재해에 취약하다. 그 때문에 과다한 화학비료의 사용으로 토양 산성화가 심각한 상황이다.

또한 감자는 전염병에 취약하고 주민들이 선호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지난 2024년에 식량 생산 구조를 벼, 밀, 보리농사로 전환해 대변혁을 이루었다고 평가했고, 2025년에도 전국적으로 밀 재배 면적이 2024년도에 비해 123%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한국 농촌진흥청의 2024년도 북한 식량작물 생산량 추정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의 밀·보리 생산량은 28만 톤으로 전년도보다 6만 톤(27.3%) 증가했다. 북한은 지난 4년간 전국의 시·군에 밀가루가공공장을 새로 건설해 밀 가공 능력도 2배 정도 높였다.

그러나 여전히 북한의 옥수수 생산량은 150만 톤 이상으로 밀·보리 생산량의 세 배를 상회한다. 북한 당국이 기존의 옥수수 소출량이 낮은 곳이나 새로운 경작지를 중심으로 밀, 보리를 심고, 심지어 논도 밀 재배지로 바꿀 정도로 심혈을 기울이고 있지만 실제 농장들에서는 알곡 생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익숙한 옥수수 재배를 고수하고 있다.

북한 스스로도 "우리나라 농경지 가운데서 강냉이(옥수수) 재배 면적이 넓고, 강냉이농사는 오랫동안 해오면서 파악이(노하우가) 있지만 밀농사는 대대적으로 하지 않아 종자도 걸리고 재배기술도 낮은 수준에 있다"('벼와 밀농사를 강하게 추진하는 것은 현시기 농업생산을 발전시키는 데서 우리 당이 중시하는 과업' 근로자 2024년 11호)고 평가하고 있다.

북한은 러시아에서 밀 종자를 들여와 파종하고, 밀 재배 기술을 대대적으로 보급하고 있지만 옥수수농장을 밀농장으로 전환해 밀 재배 면적을 '혁명적으로' 전환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과도기적으로 밀 수입량을 높이면 되겠지만 북한 당국은 재정도 부족하고, '식량 안보' 차원에서 주곡 자급률을 낮추고 싶지 않은 듯하다.

2008년 5월 19일 방문한 평양식료품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빵을 생산하고 있다.(필자 제공)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최근 러시아와의 농업 분야 협력을 통해 대안을 마련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주목되는 협력 방안은 러시아 극동지역(연해주)에서 밀을 공동경작하는 것이다.

북한의 '해외 영농' 구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이미 2001년 러시아 방문 때 푸틴 대통령에게 러시아 극동지역 농경지를 임대해 주면 25만 명 정도의 북한 인력을 파견해 콩과 호밀을 경작하고, 수확물을 나누자는 제안을 한 바 있다. 노태우 정부 이후 한국 정부도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남과 북, 러시아가 공동으로 농축산 분야에서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해 왔다.

북한의 '해외 영농' 구상은 북러관계의 변동, 대북 경제제재 등으로 미뤄졌지만 2023년 김정은 총비서의 러시아 극동지역 방문으로 다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러시아 극동지역 외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가 병합한 우크라이나 지역에도 북한 인력이 파견돼 밀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산악지대가 국토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북한에서 쌀농사만으로 식량을 자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민들 사이에선 대도시를 중심으로 아침 식사를 빵으로 해결하는 가정이 늘고, 청소년층을 중심으로 햄버거, 즉석국수(라면) 등의 속성음식(패스트푸드) 소비량이 늘고 있다고 한다. 북한이 단기간에 식량 생산 구조를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옥수수를 대신해 밀 재배 면적을 확대하면서 '해외영농'을 모색하는 북한의 정책은 김정은 시대의 중점 과제로 향후 지속적으로, 강도 높게 추진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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