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속에 자리 잡은 전자결제 [정창현의 북한읽기]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
2006년 5월 13일, 중앙일보 방북 취재진과 함께 대동강변에 있는 아리랑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식당 입구에 "우리나라에서 첫 현금카드 발행"이란 제목으로 동북아시아은행에서 발행한 '실리' 카드를 선전하는 광고문이 붙어 있었다. 북측 안내원이 평소에 잘 가지 않는 식당으로 남측 취재진을 안내한 이유가 분명해졌다. 첫 은행카드 발행을 선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2005년에 나온 '실리'는 북한 돈과 6개 외화를 입금하고 출금할 수 있는 현금카드로 당시만 해도 10개의 식당이나 상점에서 결제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5년 후 조선무역은행은 내국인(파란색)과 외국인(붉은색)이 사용할 수 있는 전자결제 카드 '나래'를 내놓았다. 사용자가 원하는 외화 금액을 충전해 사용(선불카드)하거나 계좌에 예치된 금액만큼 사용(직불카드)할 수 있었다. 이후 '고려'(고려은행), '선봉'(황금의 삼각주은행), '금빛'(대성은행) 등 여러 상업은행에서 비슷한 기능의 카드를 출시했다. 호텔과 식당, 주요 상점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가맹점도 대폭 확장됐다. 버스, 지하철 이용자를 위한 충전식 교통카드도 발행됐다.
그리고 2015년 조선중앙은행이 '전성' 카드를 내놓았다. 이를 통해 대금 결제는 물론 송금과 출금 등의 기본적인 금융서비스가 가능해졌다. 초기에는 군대 간 자식에게 소액을 송금하기 위해 카드를 이용하는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은행을 믿지 않고 카드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북한 주민들이 북한 돈이나 외화를 맡기고 전자카드를 쓰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하지만 전자상거래 플랫폼 '옥류', '만물상' 등이 개설되고, 북한 당국이 적극적으로 카드 사용을 권장하면서 '전성'과 '나래' 카드 사용이 대폭 늘기 시작했다. 2019년 북한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만물상'은 400여 개 북한 회사가 등록해 450종류 6만 개 상품을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로 성장했고, 모바일 앱도 제공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북한 당국은 2021년 '전자 결제법'(2023년 개정)을 제정해 기관과 주민의 카드 사용을 의무화했다. 시범 도입 기간을 거쳐 지난해 말부터 전국의 농장원들이 '전성' 카드를 발급받아 현금분배액을 현금이 아닌 카드로 입금받았고, 올해 초부터는 모든 기관·기업소 소속 근로자들이 생활비(임금)를 카드로 입금받기 시작했다. 실제로 지난 2월 조선노동당 신천군당위원회 한남철 책임비서는 '근로자'(2025년 2호)에 기고한 글에서 "군안의 모든 농장원 세대에 전성 카드를 마련해주어 농장원들이 현금분배를 직접 받도록 하였다"고 소개했다. 경제활동을 하는 대다수 주민이 현금카드로 생활비를 지급받고 소비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북한 주민의 카드 발급 증가와 사용 확대는 '지능형 손전화기'(스마트폰)의 보급에 맞춰 다양한 전자결제시스템의 도입으로 이어졌다. 전자결제시스템에 대해 북한은 "사용자들이 지능형 손전화기를 이용해 봉사 대금 및 각종 사용료 등 모든 대금 지불을 실현하는 새로운 현금거래시스템"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 QR코드를 이용한 간편결제 기능도 추가됐다.
2020년 조선중앙은행과 평양정보기술국 카드연구소가 공동 개발해 처음으로 스마트폰 전자결제시스템(전성)을 내놓았고, 이후 여러 기관과 회사에서 '강성', '울림', '삼흥' 등 다양한 전자결제 프로그램을 출시해 가입자 수를 늘려가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최우수 정보기술(IT)기업으로 소개된 삼흥경제정보기술사가 개발한 '삼흥전자지갑'의 경우 수백만의 가입자를 확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 주민들도 중앙은행과 상업은행에서 개인과 기업소 명의로 발급한 카드를 온라인 쇼핑몰이나 휴대전화에 등록해 다양한 소비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심지어 북한은 2023년 개정된 '전자 결제법'을 통해 "전자결제시스템을 도입·이용해야 함에도 이를 이행하지 않는 기관, 기업소, 단체 또는 공민(주민)에게 벌금을 부과"하도록 하여 모든 주민에게 전자결제를 강제하고 있다. 초보적이지만 후불 결제가 가능한 신용카드도 출시됐다. 이로써 북한 주민들에게 카드 발급과 전자결제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 사항이 됐다.
북한 당국은 몇 년 전부터 '금융 정보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이를 정책적으로 밀어붙이면서 내세운 명분은 금융 활동의 원활한 보장과 국가재정 강화다.
금융 정보화는 세계적 추세로 금융의 투명성, 편리성, 효율성을 제고하고 거래비용을 줄이기 위한 수단이다. 북한도 정보기술이 국가 간 경쟁의 핵심 요소로 부상하고, 모바일 기기 확산, 인공지능(AI) 기반 서비스 등 다양한 신기술이 IT 발전을 이끄는 세계적 추세를 수용해 관련 기술 개발과 함께 낙후된 금융 분야에 도입하고 있다. 도입 이전에 사회주의경제 경험이 있는 중국이나 베트남 등의 사례를 통해 파급효과나 부작용을 면밀하게 검토했을 것이다.
실제로 카드 사용을 통해 북한 주민들은 송금과 거스름돈 계산의 편리성 등을 체감하고 있다. 특히 휴대전화 하나면 모든 국영상점과 국가에 등록된 개인 상점, 온라인 쇼핑몰에서 편리하게 결제할 수 있기 때문에 '디지털 문화'에 익숙한 신세대들 사이에서 호평받고 있다고 한다. 북한 당국은 카드나 전자결제 사용에 익숙하지 않거나 꺼리는 주민들을 위해 지역별로 '금융 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주민의 편의성 제공과 함께 북한은 현금 유통량 축소와 무현금 유통량 확대를 통해 과거 은행의 신뢰도 저하로 활성화된 사금융을 통제하고 주민들이 보유한 외화를 재정으로 흡수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 환전상과 송금업자, 대부업자들의 활동을 통제하고, 자금의 흐름을 세밀하게 파악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로 국가 재정과 은행의 수입 확대를 기대할 수 있다. 관료들의 부정부패 예방, 부유층의 자금이나 시장의 유동자금 추적 등 사회경제적 통제도 쉬워진다.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편리하기는 하지만 국가가 다 들여다볼까 불안하다'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처음 현금카드가 출시된 후 20년 동안 북한에서는 카드 발급과 전자결제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은행카드가 전무했던 사회에서 누구나 최소한 카드 한 장은 소지해야 하는 사회로 변모됐다. 북한식으로 표현하자면 금융 분야의 '단번 도약'이 이뤄진 셈이다. 신세대들은 등하교 교통비부터 시작해서 학교 매점과 구역시장 물품 구입비, 자료나 앱 다운 및 온라인 게임비 등을 익숙하게 휴대전화로 결제하게 됐다.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장년층도 생활비가 카드로 입금되면서 점차 '사회주의 금융' 질서와 생활의 전환에 적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이러한 사회 변화는 북한의 핀테크(FinTech, Finance와 Technology의 합성어) 산업 성장과 주민 생활의 변모뿐만 아니라 향후 해외 투자유치, 관광 확대 등 국제교류와 협력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남북관계 측면에서도 남북한 청년층의 이질감을 감소시키고, 디지털금융 분야의 협력 가능성을 열어 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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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북한 정치·군사·사회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함께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등 북한 수뇌부에 대한 '리더십 해석'을 통해 반 발짝 앞서 북한의 변화를 읽어낸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은 서울대 대학원(국사학과)을 마치고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 전문기자를 거쳐 국민대·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국가기록원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