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와 철도, 상점도 무기였다…부산 경제인들의 독립운동
객주 44명의 상권 수호에서 백산상회의 임정 지원까지
광복 81주년·부산항 개항 150년에 되짚는 '경제 독립'
- 홍윤 기자
(부산=뉴스1) 홍윤 기자 = 장부와 철도, 상점도 외세에 맞서는 무기가 됐다. 부산의 상인들은 일본 자본이 지역 상권을 파고들자 힘을 모아 회사를 세웠고, 우리 자본으로 철도와 은행을 만들려 했다. 국권을 빼앗긴 뒤에는 평범한 상점 간판 아래서 독립자금과 사람이 오갔다.
광복 81주년이자 부산항 개항 150주년을 맞은 올해, 만세운동과 무장투쟁에 가려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부산 경제계의 항일·독립운동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2027년 개관을 앞둔 부산독립운동기념관에 이들의 역사를 충실히 담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15일 부산 상공계와 역사 자료 등에 따르면 부산 경제인들의 저항은 1876년 부산항 개항 직후 시작됐다.
이른바 강화도조약으로 불리는 '조일수호조규'에 따라 부산항이 개항하면서 일본 상인들은 부산을 발판 삼아 조선 내륙으로 빠르게 진출했다. 이들은 생산자와 직접 거래하며 곡물 등을 대량으로 사들였고, 지역의 유통 질서와 조선 상인들의 생존 기반을 흔들었다.
이에 맞서 동래부가 선정한 객주 44명이 1889년 '부산객주상법회사'를 세웠다. 개항 이전까지 개별적으로 영업하던 객주들이 외국 상인의 시장 잠식에 대응하기 위해 조직적인 경제 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부산객주상법회사는 일본 상인들의 무분별한 곡물 매입과 가격 교란을 막고 조선 상인들의 거래 질서를 지키는 역할을 했다. 부산상공회의소는 이 회사를 자신의 모태로 보고 있다.
개항이 외국 자본의 통로가 됐다면 부산객주상법회사는 이에 맞서 세운 경제적 방어선이었던 셈이다.
저항은 기존 상권을 지키는 데 머물지 않았다. 근대 산업의 주도권을 우리 손에 쥐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부산 출신 상인 박기종 선생은 1890년대 후반 한국인 자본으로 철도를 놓겠다는 구상을 세웠다. 무역항으로 성장하던 부산과 낙동강 수운의 중심지 하단포를 잇는 약 6㎞ 길이의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부하철도회사'를 설립하고 1898년 철도 부설권을 얻었다.
사업은 자금 부족과 낮은 수익성, 경부선 건설계획 등의 벽을 넘지 못하고 중단됐다. 그러나 외국 자본에 철도 이권을 빼앗기던 시대에 한국인이 직접 회사를 세우고 노선까지 설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박 선생이 지금까지 '철도왕'으로 불리는 이유다.
그가 철도 부설권을 얻기 위해 서울에서 관료들과 교섭했던 과정은 직접 남긴 '상경일기'에 담겨 있다. 부산박물관 소장품인 이 기록은 올해 국립해양박물관 기획전시 '개항, 부산항 150년'을 통해 시민들에게 소개되기도 했다.
박 선생의 경제 자립 구상은 사위인 윤상은 선생에게 이어졌다. 윤 선생 등은 1908년 구포저축주식회사를 설립했고, 이를 토대로 1912년 국내 최초의 민족계 지방은행으로 평가받는 구포은행을 세웠다. 철도에서 금융으로 무대는 달라졌지만 민족 자본으로 경제의 주도권을 지키려는 뜻은 같았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긴 뒤에는 기업과 상점이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변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백산 안희제 선생이다. 한학을 공부하던 안 선생은 러일전쟁과 을사늑약을 거치며 계몽운동에 눈을 떴고, 경제를 통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는 고향의 전답을 팔아 마련한 자금으로 1914년 부산에 백산상회를 세웠다. 처음에는 곡물과 면포, 해산물 등을 취급하는 작은 개인상회였지만 1918년 합자회사로 개편됐고, 이듬해에는 백산무역주식회사로 몸집을 키웠다.
겉으로는 평범한 상점이었지만 그 안에서 오간 것은 상품만이 아니었다. 백산상회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에 자금을 전달하는 거점이자 독립운동가들을 이어주는 연락망이었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을 국내에 들여오는 통로 역할도 했다.
안 선생은 경제 활동에 그치지 않았다.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기미육영회를 조직해 청년들의 유학을 도왔다. 중국 영안현 동경성에는 해외 독립운동기지인 '발해농장'을 세웠다. 조선주조주식회사와 경남인쇄주식회사 등 부산 지역의 조선인 기업을 설립하는 데도 힘을 보탰다.
백산상회가 1928년 문을 닫을 때까지 독립운동에 보낸 자금의 정확한 규모는 확인되지 않는다. 상점의 장부만으로는 남길 수 없는 돈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백산상회가 민족 자본과 독립운동을 잇는 핵심 거점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사료에 남아 있다.
무역활동을 하던 박재혁 선생은 경제인의 길에서 무장투쟁으로 나아갔다.
상하이 등지를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하던 박 선생은 여러 독립운동가와 교류하다 1920년 8월 김원봉 선생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같은 해 9월 고서적 상인으로 위장해 부산경찰서에 들어간 뒤 경찰서장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현장에서 붙잡힌 박 선생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일제의 손에 처형당하지 않겠다며 옥중에서 단식에 들어갔고, 이듬해 순국했다. 경제활동을 통해 구축한 해외 인맥과 이동 경로가 항일 투쟁으로 이어진 사례였다.
경제적 저항의 주체는 상인과 기업인만이 아니었다. 부산항 노동자들도 일제 자본의 착취에 맞서 거리로 나섰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불황이 닥치자 일본인 운송업자들은 이를 명분으로 조선인 부두노동자들의 임금을 거듭 깎았다. 결국 1921년 8월 부산 부두노동자를 중심으로 운수 노동자 5000여 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은 15일 동안 이어졌다. 지역 사회와 노동자들의 연대 속에 10~15%의 임금 인상을 끌어냈다. 국내 노동운동사상 최초의 대규모 파업이자 도시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벌인 대표적인 항일 노동운동으로 평가된다.
경남인쇄주식회사 등 지역 기업도 선전물을 인쇄하며 힘을 보탠 것으로 전해진다. 객주들이 지키려 했던 상권과 박기종 선생이 꿈꾼 산업 주권, 백산상회가 뒷받침한 독립운동이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부산 경제계는 이제 이러한 역사가 부산독립운동기념관에 제대로 기록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산독립운동기념관은 부산시민공원 내 시민사랑채를 새롭게 단장해 2027년 상반기 문을 열 예정이다. 부산 지역 최초의 독립운동 전문기념관으로 추모 공간과 상설·기획전시관, 체험·교육 공간 등이 들어선다.
부산상의는 부산객주상법회사와 박기종 선생, 백산상회 등 부산 경제계의 항일 역사를 기념관의 주요 전시 콘텐츠로 반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개항의 문으로 밀려든 경제 침탈에 부산 사람들은 회사와 철도, 은행과 상점, 파업으로 맞섰다. 경제 주권을 지키려 했던 이들의 분투 역시 부산 독립운동사를 떠받친 또 하나의 기둥이기 때문이다.
red-yun87@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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