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자산' 채권에 투자하고도 무너진 실리콘밸리은행 [손엄지의 주식살롱]

"금리가 오르면 채권 가격은 떨어진다"
채권은 '발행자'와 '기간'에 따라 안전성에 차이

퍼스트 시티즌스 뱅크와 SVB를 합성한 시각물 ⓒ 로이터=뉴스1

(서울=뉴스1) 손엄지 기자 = 최근 JTBC 회사채에 투자했다가 원금 손실 위기에 놓인 투자자들이 "채권은 안전하다고 믿었다"며 불완전판매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채권을 예금처럼 생각하지만, 채권은 결코 '무조건 안전한 상품'이 아닙니다.

이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2023년 미국의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채권인 미국 국채에 투자했던 은행이 왜 무너졌을까요.

SVB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털(VC)을 주 고객으로 둔 은행이었습니다. 코로나19 당시 풍부한 유동성으로 스타트업 투자 열풍이 불면서 예금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SVB에는 돈이 쌓여갔습니다.

SVB는 이렇게 쌓인 돈을 미국 국채에 투자했습니다. 은행의 전형적인 수익 구조인데요. 고객에게 연 2% 안팎의 이자를 지급하면서 이를 연 5% 수익을 주는 국채에 투자하면 3%P의 이익을 남기는 방식입니다.

SVB는 더 높은 이익을 얻기 위해 만기가 긴 미국 국채를 대거 매입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채권은 만기가 길수록 금리가 높습니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준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친구가 한 달 뒤 갚는다면 이자를 거의 받지 않을 수도 있지만 10년 뒤 갚는다면 그만큼 더 높은 이자를 요구하게 되겠죠. 채권도 같은 원리입니다.

미국 국채는 미국 정부가 디폴트를 내지 않는다면 만기에는 약속한 원금과 이자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채권을 '고정수익(Fixed Income)' 상품이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예상치 못한 금리 인상이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기준금리를 불과 1년여 만에 0%대에서 5%를 넘는 수준까지 빠르게 올렸습니다.

금리가 오르자 스타트업 투자 시장은 빠르게 얼어붙었습니다. 벤처캐피털의 투자도 줄었고,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스타트업들은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에 맡겨둔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더 높은 금리를 찾아 예금을 옮기려는 고객들까지 늘어나면서 SVB에는 단기간에 막대한 인출 요청이 몰렸습니다. 파산 직전 하루 동안에만 약 420억 달러의 예금이 빠져나가려 했습니다. 전형적인 '뱅크런(Bank Run)'이 발생한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금은 10년 이상 만기의 장기채권에 묶여 있었습니다. 만기까지 기다리면 원금과 이자를 받을 수 있었지만 고객들은 지금 당장 돈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SVB는 보유 중인 채권을 만기 전에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채권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등장합니다. "금리가 오르면 채권 가격은 떨어진다" 입니다.

예를 들어 연 3% 이자를 주는 채권을 갖고 있는데 새로 발행되는 채권이 연 5%를 준다면 누가 3% 채권을 같은 가격에 사려고 할까요. 기존 채권은 가격을 낮춰야만 팔립니다. 반대로 금리가 내려가면 기존의 높은 금리를 주는 채권이 인기를 끌면서 가격이 올라갑니다.

SVB가 보유한 장기 국채 역시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가격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결국 SVB는 손실을 감수하고 채권을 처분해야 했고, 약 18억 달러의 손실을 확정했습니다. 자본 확충 계획까지 발표했지만 시장의 불안은 오히려 커졌고, 더 많은 예금이 빠져나가면서 은행은 불과 이틀 만에 무너졌습니다.

미국 정부와 연준은 금융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 예금을 사실상 전액 보호하고, 국채 등을 담보로 은행들이 자금을 빌릴 수 있도록 긴급 대출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SVB 자체는 결국 파산 절차를 밟았습니다.

SVB 사례는 채권이 '안전자산'이라는 말이 절반만 맞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미국 국채 자체는 부도 위험이 매우 낮았습니다. 문제는 만기까지 보유하지 못하고 중간에 팔아야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안전한 자산이라도 유동성 위기가 발생하면 손실을 확정해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만기가 긴 채권일수록 금리 변화에 더 민감해 가격 변동폭도 커집니다.

채권은 모두 같은 위험을 가진 상품이 아닙니다. 미국 국채와 한국 국채, 통안채, 회사채는 위험도가 모두 다르고, 회사채는 기업의 신용등급에 따라 위험 수준이 크게 달라집니다. 채권의 안전성은 '채권'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누가 발행했는지'와 '만기까지 버틸 수 있는지'에 의해 결정됩니다. SVB가 남긴 가장 큰 교훈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뉴스1 김지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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