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 약세에도 환율 1300원대…달러 버티는데 원화는 왜 강해졌나

ADR·기업 달러 매도에 외인 주식자금까지…연준 금리인상 기대도 후퇴
베선트 '亞 통화 약세' 제동 신호 지속…"1300원대 안착은 9월 판가름"

19일 오후 은행 딜링룸 전광판에 표시된 환율 ⓒ 뉴스1 박정호 기자

(서울=뉴스1) 김혜지 기자 = 증시가 약세를 보이고 글로벌 달러 가치도 강보합세를 나타내는 가운데 달러·원 환율이 19일 장중 11개월 만에 1300원대로 내려섰다. 중동 긴장 고조와 미국 국채 금리 상승 등 통상 원화 약세를 부추길 만한 대외 여건에도 심리적 지지선으로 여겨졌던 1400원 선을 뚫고 내려서며 원화 강세가 두드러지는 모습이다.

시장에서는 SK하이닉스 미국주식예탁증서(ADR) 관련 환전과 수출기업의 달러 매도 등 국내 달러 공급이 환율 하락을 이끈 가운데, 미국의 금리 인상 기대 약화와 미·일 외환시장 공조 이후 형성된 '아시아 통화 약세 제동'에 대한 기대 등이 맞물린 결과로 보고 있다.

앞서 이달 중 1300원대 진입은 다수 전문가가 예측했던 만큼, 이제 관건은 1300원대를 새로운 달러·원 거래의 기준점으로 굳힐 수 있느냐로 옮겨갔다. 전문가들은 1300원대 안착 가능성을 낮게 보면서도, 실제 안착 여부는 9월께 판가름 날 것으로 전망했다.

ⓒ 뉴스1 윤주희 디자이너
달러 버티는데 원화 강세…수급·펀더멘털이 대외 악재 눌러

이날 원화 강세의 가장 직접적인 동력은 국내 수급이었다. ADR 관련 환전 물량이 9월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반도체·조선 등 수출기업의 달러 매도가 가세했고, 8월 말 법인세 중간예납을 앞둔 기업의 환전 수요도 환율을 끌어내렸다.

신한투자증권은 최근 환율이 글로벌 달러 가치보다 대내 요인에 더욱 연동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지난 1~20일 신기록을 다시 경신한 수출이 원화 펀더멘털을 지지하는 가운데 법인세 납부 일정까지 가세해 환율 하방 우위가 예상된다는 해석이다.

오재영 KB증권 연구원은 "수년간 수급 불균형이 환율 상승을 견인하고 있으나 펀더멘털에 기반한 환율은 1300원대로 하락할 수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외국인 자금도 원화 강세에 힘을 실었다. 8월 둘째 주 외인은 넥스트레이드 거래를 포함해 코스피에서 9조 2000억 원어치를 순매수했다. 지난 6월 중순~7월 초 원화 약세를 부추겼던 외국인 증시 이탈이 완화되면서 달러 공급 우위가 더욱 뚜렷해진 셈이다.

美 고용·물가 식자 연준 인상 기대↓... 환율 하방에 힘

미국 통화정책 환경도 원화 가치에 우호적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고용 지표 부진에 이어 최근 물가 지표까지 시장의 경계심을 낮추면서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9월 금리 인상 기대가 약해졌다.

오 연구원은 "미국 지표 부진이 연준 긴축 우려를 완화해 달러의 추가 반등을 제한하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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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본격적인 약달러 추세로 해석하긴 어렵다. 김지나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미·이란 갈등 장기화와 높은 미국 장기 국채금리 등을 이유로 "당분간 달러 가치 하단은 견고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각에서는 미국 10·30년물 국채금리가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중동 긴장이 계속되는 가운데, 환율은 되레 내려갔다는 점에서 최근 움직임은 달러 약세보다 '원화 자체의 강세' 성격이 짙다는 해석도 내놓는다.

특히 이날 증시가 약세를 보이는 와중 환율이 1300원대로 내려선 점은 근래 원화 강세가 주식 시장 흐름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우며, 기업 유동성과 경제 펀더멘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베선트 효과' 여전...원화 약세 베팅에 보이지 않는 손

미·일 외환시장 공조로 형성된 정책 기대 또한 환율을 누른 요인으로 꼽힌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지난달 말 미·일 공동 개입 이후 엔화 약세가 주변 아시아 통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하며 '원화의 과도한 변동성'을 직접 거론했다.

오 연구원은 "미국 정부가 아시아 통화 전반의 강세를 유도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국의 개입만으로 환율의 장기 추세를 바꾸기는 어렵지만, 미국의 강한 관리 의지 표명은 시장에서 과도한 원화 약세에 베팅하기를 실제로 꺼리게 한다는 설명이다.

미국이 아시아 통화 약세를 경계할 유인은 최근 오히려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 10년물 국채금리는 지난 18일 2.96%로 30년 만의 최고치, 30년물은 4.155%로 19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덩달아 미국 30년물 금리는 장중 5.3%를 웃돌았다.

김호정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미국의 아시아 통화 위험 관리는 공식적으로 경쟁적 통화 절하를 차단하려는 목적이지만, 실제로는 일본계 미 국채 수요의 감소와 글로벌 레버리지 포지션의 전염을 억제해 자국 금융 조건을 안정시키는 이해와도 직접 연결된다"고 분석했다.

일본 금리가 오르면 미 국채보다 일본 국채의 상대적 매력이 높아져 일본계 자금이 자국으로 돌아가거나 미 국채 재투자를 줄일 수 있다. 이는 미 국채 수요 감소와 미국 장기금리의 추가 상승으로 연결될 수 있어 미국이 엔화 불안을 방치하기 힘든 주요 배경으로 지목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 AFP=뉴스1
1300원대 찍었다고 끝 아니다…'안착'은 단기 수급 후 판가름

다만 전문가들은 1300원대 '진입'과 '안착'은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다.

공동락 대신증권 연구원은 "환율이 한 달 만에 150원 넘게 급락해 추가 급락은 부담스러울 수 있다"며 "중동 문제나 연준 긴축 우려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 아니면 연내 1300원대 안착은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신한투자증권도 8월 말까지 환율 하방 우위를 예상하면서도 최근 환율이 크게 낮아진 데 따른 달러 저가 매수가 하락 속도를 제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관건은 원화 강세를 주도하는 수급이 약해진 뒤다. ADR 환전과 수출업체 네고, 법인세 중간예납 등의 달러 공급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환율 하방 압력이 유지될 수 있지만, 이후에는 내국인의 해외투자와 수입기업 결제 등 달러 실수요가 다시 부각될 수 있어서다.

미국의 개입 역시 환율 추세를 영구적으로 바꾸는 재료는 아니다. 김호정 연구원은 향후 엔화 방향이 일회성 개입보다 일본은행(BOJ) 금리 경로와 실제 일본 자금의 환류 속도에 의해 결정될 것으로 봤다.

종합하면 1300원대가 환율의 새 균형점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최근의 일시적 달러 공급이 종료된 이후에도 수출·경상수지 등 원화 펀더멘털이 받쳐주고 연준의 추가 긴축 우려와 중동 리스크까지 완화돼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1400원 선 돌파가 원화 강세의 첫 관문이었다면, 실질적인 시험대는 일회성 수급이 소진되는 9월께가 될 전망이다.

icef08@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