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때와 달라" 외치면서도…'환율전쟁' 발담근 외환당국
[긴급진단, '킹달러 시대] ③ '97·08년 트라우마' 정부의 '이중전선'…위기론 일축 + 환율 방어
달러 풀지만 "한 국가 레벨론 대응 한계" 시각도…'긴 시계' 해법에 방점
- 김혜지 기자
(서울=뉴스1) 김혜지 기자 = "환율이 오르니까 '환율 급등 = 외환위기'로 보는 트라우마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최근 대외 건전성 상황은 (외환위기 당시와) 판이하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지난달 29일)
환율이 치솟으며 시장이 요동칠수록 정부 당국자들의 입은 바빠진다. 이들은 최근 '경제 위기론'을 일축하는 발언을 일제히 쏟아냈다.
동시에 외환 당국이 실시하는 시장안정조치의 강도는 올 초와 비교해 확연히 높아진 양상이다. 당국은 올 2분기에만 22조원 상당의 외환을 시장에 던졌다. 환율이 오르자 시장에 달러를 푸는 물량 개입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외환 당국의 이런 태도는 얼핏 이중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한국의 위기 가능성은 '없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환율 통제의 강도는 점차 높이는 식이라서다.
'위기론 확산 방지와 환율 상승 방어', 우리 외환 당국이 이처럼 이중 전선(戰線)을 형성한 배경에는 과거 경제위기 당시 형성된 트라우마뿐만 아니라 최근 악화된 무역수지, 가계부채 등이 복합 작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위기 가능성 매우 낮아"…시장 트라우마 통제 '주력'
우선 외환 당국자들은 최근 '한국의 경제 위기 발발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메시지를 시장에 계속해서 보내고 있다.
달러·원 환율이 장중 1440원(9월28일)을 넘어선 지 하루 뒤인 지난달 29일,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아시아 지역 주변의 위기 재연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발언했다.
우리 경제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환율이 치솟는 상황을 똑같이 겪었다. 이에 시장 참여자는 물론 당국자들 역시 환율 상승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이번만큼은 정말 다르다'고 시장을 설득한 셈이다.
추 부총리의 말이 일리가 없진 않다.
당국이 그 근거로 드는 지표에는 '실질실효환율'이 있다. 실질실효환율은 한 나라의 화폐가 지닌 실질적인 구매력을 측정하는 지표로서, 물가와 교역 비중 등을 반영해 구한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달 27일 기준 원화의 실질실효환율은 103.03으로, 일본의 엔화(70.14), 유로존의 유로화(88.35)보다 양호한 모습을 보였다. 중국 위엔화(127.53)보다는 구매력이 낮으나 나름은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외환보유고도 튼튼한 편이다. 앞서 추 부총리는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는 경제 규모 대비 25%"라면서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세계 1위이지만 경제 규모 대비로는 18% 정도라 우리가 상대적으로 외환보유고가 더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우리가 외환을) 그렇게 많이 갖고 있는데 뭘 그렇게 걱정하고, 옛날하고 완전히 다르지 않나"라면서 시장의 불안을 달랬다.
대외 자산 역시 과거 위기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건전해졌다고 강변한다. 추 부총리는 "옛날엔 금융회사에서 결제가 잘 안돼 단기 자금이 경색되고 단기외채가 급증하고 환율이 오르는 현상이 생겼는데 그때는 대외금융자산이 마이너스 700억달러였다면 지금은 플러스 7400억달러"라고 강조했다.
당국은 현 상황을 이성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경제 불확실성이 상당히 높아진 것은 맞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불확실성'이고, 실제 우리 경제의 '건전성'은 과거 위기를 거치면서 꾸준히 개선돼 지금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튼튼해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당국은 위기론 확산 방지를 1차적인 환율 방어 전선으로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흔히 '경제는 심리'라고 하듯, 시장 불안이 실제 위기로 연결되지 않도록 개입한 셈이다.
◇무역적자, 가계빚에 금리인상 부담…긴장도 높인 당국
그러나 지금은 당국이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 있는 상황도 결단코 아니다. 우리의 대외 건전성은 과거나 국제 대비 우수할지 몰라도 불확실성은 유례없이 높은 탓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는 연내 금리를 연달아 큰 폭으로 인상할 전망이다. 올 연말이면 미 기준금리가 4.4~4.5% 수준에 달한다는 기대가 시장에 형성돼 있다. 이는 올해 말까지 미 금리가 1.25%포인트 추가 인상된다는 뜻이다.
가파른 미 금리 인상에 국제 자금 이동은 빨라졌다. 영국·유럽연합(EU)·중국 등 전 세계 통화가 대조정기를 맞이하면서 출렁이게 됐다.
한 나라의 악재가 다른 곳으로 전이되고, 그에 따라 증시와 채권 자금도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지길 반복 중이다.
이처럼 대외 변동성이 높을 때는 '이 국가가 과연 달러를 잘 구해올 수 있는지'의 능력이 환율 방어에 중요한 요건이 된다.
우리나라처럼 수출 중심 경제를 가진 나라라면 달러 확보 능력은 곧 '무역수지'의 흐름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의 무역수지는 원자재 가격 상승과 반도체 경기 하강 등 여파로 9월까지 6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 중이다.
미래 환율 방어에 있어 매우 나쁜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세계 최대 수준인 가계부채 문제도 당국을 긴장케 한다.
시장에서는 한국이 미국의 인상 폭에 따라 금리를 쉽사리 올릴 수 없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가계부채가 많고 특히 부동산·주식 등 자산에 몰렸으니, 금리를 높이면 이자 부담 탓에 자산 가격이 떨어지고 연체와 금융 시스템 부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금리를 높이기 힘들다는 뜻은 원화 가치의 방어도 어렵다는 뜻이 된다.
결국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은 대외 건전성이 강화된 가운데서도 취약한 지점들, 즉 '뇌관'이 여럿 존재하는 국가로 평가된다. 펀더멘털도 좋고, 위기에 대비한 비상금 역시 제법 마련했음에도 일부 문제에 대해선 유독 병약한 구조만큼은 계속 걸림돌인 형세다.
따라서 '위기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더 긴장하겠다'는 당국의 자세가 설명된다.
◇달러 풀고, 국내 들여오고…그래도 '일시 개입'보단 '긴 시계'로
실제로 최근 잇단 시장안정조치는 우리 당국의 긴장감을 보여주는 듯하다.
당국은 그간 외환시장 불안과 관련해 구두개입과 같은 미세조정에 치중해 왔다.
하지만 환율이 빨리 치솟기 시작한 지난달부터는 보다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달 23일 국민연금공단은 한국은행과 외환 스와프(맞교환)를 14년 만에 재개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를 할 경우 시장이 아닌 한은을 통해 달러를 조달하게 돼 시장 내 달러 수요를 줄이는 효과가 기대된다.
정부는 조선사의 선물환 매도를 지원해 연말까지 약 80억달러 규모의 선물환 매도 물량을 공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또 이른바 '서학개미'가 해외 주식을 팔면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기업과 금융사가 해외 자금을 국내로 가져올 경우 세제 혜택을 주는 방안도 살피는 중이다.
문제는 이런 노력이 단기간에 걸친 불안에는 효과를 볼진 몰라도 꾸준히 시장을 안정시킬 수는 없다는 점이다.
예컨대 올 2분기 외환 당국이 시장 안정화를 위해 실시한 순매도 금액은 154억900만달러(약 22조원)에 달했다. 이는 기재부와 한은이 시장안정조치 내역을 분기별로 공개하기 시작한 2019년 3분기 이래 최대다. 이번 3분기(7~9월)에는 환율이 더욱 치솟은 만큼 더 많은 순매도가 이뤄졌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국제적으로 자본 이동이 자유로운 국가로, 은행 간 현물환 거래 규모만 하루 100억달러를 넘긴다. 환율을 특정 지점에 묶어놓고자 개입을 지속할 경우 외환보유고를 소진하면서 오히려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결국 환율의 장기 안정을 위해서는 한 나라만의 노력을 넘어선 국제 수준의 공조가 요구된다. 세계적 석학인 모리스 옵스펠드 교수는 최근 콘퍼런스에서 각 나라가 외환보유고를 소진해 일시적 환율 방어에 치중하기보다 넓은 시각에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옵스펠드 교수는 "(최근 외환시장 불안에 따라) 각국이 경쟁적으로 통화 가치를 절상하고 인플레이션을 수출하는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 빠질 수 있다"며 "통화 정책 협력을 통해 이를 사전에 방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단기 변동성에 일희일비하며 매번 대응하기보다는, 장기적이고 넓은 시야에서 금융 변동 수준을 구조적으로 낮출 체제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국도 같은 판단 아래 정책조합을 마련 중이다.
추경호 부총리가 지난달 22일 환율 대응과 관련해 '긴 시계'를 언급한 배경이다. 당시 추 부총리는 "경제팀은 긴밀한 공조 하에 넓고 긴 시계를 견지하며 현 상황에 대응해가겠다"면서 "단기간 내 변동성에 대해서는 적극 관리해 나가는 한편, 내년 이후의 흐름까지도 염두에 두고 최적의 정책조합을 모색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당국은 국제 공조에도 속도를 붙이고 있다.
추 부총리는 지난달 30일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과의 통화에서 주요국 유동성 경색 확산 등으로 금융 불안이 심화할 경우 유동성 공급 장치를 실행하고자 양국이 긴밀히 협력할 준비가 됐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추 부총리는 통화에서 "긴축적 글로벌 금융여건이 우리 경제에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양국이 최근 금융·외환시장 동향을 면밀 점검하고 외환시장 관련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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