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사망] '아웅 산 테러·KAL기 폭파'…남북, '대결' 속 대화도 병행

분단 이후 최초로 이산가족 상봉·북한의 수해지원도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난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했다. 향년 90세. (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 캡처) 2021.11.23/뉴스1

(서울=뉴스1) 서재준 기자 = 전두환 정권의 남북관계는 대화와 대결이 오갔던 시절로 볼 수 있다. 남북 간 갈등은 북한의 두 차례에 걸친 테러로 인명이 희생되는 끔찍한 결과까지 낳기도 했다. 동시에 분단 후 처음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기도 한 시기다.

1983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남북의 외교전이 첨예하던 1983년 10월8일 미얀마(당시 버마)를 방문한다.

방문 이틀 째인 10월9일 미얀마의 독립 영웅인 아웅 산 장군의 묘소를 참배하기로 한다. 서석준 경제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등 수행원들은 먼저 도착해 도열한 뒤 전두환씨를 기다리기로 했다.

행사를 준비하던 중 폭탄이 터졌다. 북한 공작원들이 전씨가 도착한 것으로 오인한 것이라는 설과 폭탄이 그냥 터져버린 것이라는 설이 공존한다. 이 폭발로 고위 당국자 및 주요 수행원 중 16명이 사망한다. 당시 현장을 취재 중이던 동아일보 기자도 사망했다.

전씨는 당시 자신을 안내할 미얀마 외무장관이 약속 시간에 늦으면서 폭사를 피할 수 있었다.

이후 미얀마 당국은 3명의 북한 공작원들을 수사망에 올려 1명은 사살하고 2명은 체포한다. 그러나 북한은 이들이 자국민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며 소행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쟁 위기까지 간 이 사건은 그러나 미국의 '상황관리'와 군을 통제한 전씨로 인해 국지전, 전면전으로 확대되지 않았다.

이 같은 위기를 겪고도 남북은 불과 6개월만인 1984년 4월부터 약 한 달간 세 차례의 체육회담을 연다. 이는 같은 해 여름 미국 LA올림픽 단일팀 출전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회담은 아웅 산 테러 사건의 여파, 회잠 개최 일주일 전에야 밝혀진 신상옥·최은희 납북 사건의 파장으로 인해 결렬된다.

역시 1984년 여름 서울과 경기도에 내린 폭우로 인해 큰 수해가 발생하자 북한은 국력 과시를 위한 수재물자 지원을 제안한다. 9월에 열린 적십자 회담을 통해 북한의 지원물자가 판문점을 통해 들어오게 된다.

1985년에는 사상 첫 이산가족 상봉이 개최됐다.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이 행사는 적십자 회담을 통해 성사됐다.

남북 각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50명과 예술공연단 50명이 서울과 평양을 상호 방문해 가족들을 만났다.

1985년에는 남북국회회담을 위한 예비접촉이 진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불가침 선언'을 합의할 것을 요구한 북한의 입장과 이는 국회가 관여할 사안이 아니라는 우리 측의 입장이 대립해 본회담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1987년 11월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대한항공 KE858편이 인도양 상공에서 실종된다. 수사 결과 이 사건은 북한의 공작원 김현희, 김승일이 중간 기착지에 내리기 전에 자신들의 자리에 설치한 폭탄으로 비행기를 폭파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은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에서 적발된다. 그러나 김승일은 체포 과정에서 자살하고, 자살에 실패한 김현희는 제13대 대통형 선거 전날 전격 한국으로 압송된다.

전두환 정권에서 첨예한 대립과 대화가 반복되던 남북관계는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무게추가 기울게 된다.

남북의 '대립과 대화'는 반복됐지만 북한은 노태우 정권 시절 유엔 가입을 계기로 우리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테러를 감행하는 등의 극단적 행동은 자제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력과 외교력에서도 밀리기 시작한 북한은 국력으로 남한을 이기지 못하고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맞이하게 된다.

seojiba3@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