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경쟁은 '관리 국면'…한국 전략적 자율성, 선택 회피 아니다"

"반도체·AI·조선·방산 등 대체불가 역량 키워 전략적 협상력 확보해야"

지난 5월15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베이징 중난하이 정원을 방문한 뒤 떠나면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다.2026.05.15. ⓒ AFP=뉴스1

(서울=뉴스1) 김예슬 기자 = 미국과 중국의 '관리된 경쟁' 국면으로 장기화되는 만큼,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선택을 미루는 방식의 '전략적 자율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선택에 따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역량과 외교적 설득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6일 아산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정구연 객원연구위원은 최근 발간한 '미국의 시각에서 본 베이징 미중 정상회담과 한국 대외정책에 대한 함의' 보고서에서 지난 5월 14일 열린 미중 정상회담을 "미중관계의 전환점이라기보다 '관리된 경쟁'이 장기화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저 연구위원은 이번 정상회담의 핵심 성과에 대해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 관리였다"라고 진단했다. 미중은 정상회담에서 양국 관계를 '공정성과 상호주의에 기초한 건설적인 전략적 안정 관계'로 관리하기로 하고 비민감 상품 교역과 투자 문제를 다룰 무역·투자위원회 설치에 합의했다.

그러나 미중은 첨단 인공지능(AI) 칩과 희토류·핵심 광물, 대만 문제 등 양국의 핵심 이해가 충돌하는 분야에서는 실질적인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보고서는 이를 두고 미중 경제관계가 전면적인 디커플링(탈동조화)으로 향하기보다는 민감 영역과 비민감 영역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재편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농산물과 항공기, 일부 소비재 등의 거래는 유지하면서도 첨단 반도체와 AI, 핵심 광물, 군사 전용 가능 기술 등 전략 분야에서는 경쟁과 통제를 지속한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이 대만 문제와 민주주의·인권, 발전 경로·정치체제, 중국의 발전 권리를 미국이 도전해서는 안 되는 '4대 레드라인'으로 제시한 점에 주목했다.

보고서는 미국이 중국의 레드라인을 그대로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중국과의 전략경쟁을 포기하지 않은 채 가치·동맹 중심의 경쟁에서 거래·억지·정상 간 교섭을 통한 전략적 안정 추구로 관리 방식을 바꾸고 있다고 평가했다.

정 연구위원은 미중 경쟁의 이 같은 변화가 한국의 전략 환경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은 미국과 안보동맹을 맺고 있으면서도 중국과 깊은 경제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다 반도체와 AI, 배터리, 핵심 광물, 조선, 방산 등 미중 경쟁의 핵심 분야에 직접적으로 연계돼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의 지난해 반도체 수출은 전년 대비 22.2% 증가한 1734억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보고서는 한국 경제가 글로벌 AI 수요와 첨단 반도체 공급망에 깊게 연결된 만큼 미중 기술 경쟁의 압력을 가장 강하게 받는 국가 중 하나라고 진단했다.

핵심 광물 분야에서도 중국이 희토류 등의 수출 통제를 전략적 지렛대로 활용하고 미국이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하면서 한국은 중국과의 협력과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고 분석했다.

반면 조선과 방산 분야는 한국의 전략적 협상력을 높일 수 있는 자산으로 평가됐다. 미국이 중국과의 장기 경쟁 속에서 해군력과 물류·정비, 상선·군함 건조 역량을 중시하면서 한국의 조선·방산 능력이 단순한 산업 경쟁력을 넘어 전략적 자산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에 보고서는 미중 경쟁 시대의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 개념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정 연구위원은 "전략적 자율성은 선택을 회피하는 능력이 아니라, 선택의 비용을 감당하고 조정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재정의돼야 한다"며 "특정 사안에서 미국과 협력하거나 중국과 경제관계를 유지하려면 그 선택을 뒷받침할 산업 역량과 외교적 설득력, 공급망 대안, 국내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반도체와 배터리, AI, 조선, 방산, 바이오 등에서 대체 불가능한 산업·기술 역량을 확보하고 미국과는 수출 통제·보조금·관세 정책 등에 대한 협의 채널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중국과도 고위급 경제안보 대화와 공급망 조기경보 채널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정 연구위원은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은 '미중 사이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안에서 어떤 원칙과 역량을 갖고 선택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며 "핵심 이익을 식별하고 동맹과 파트너를 활용하며 중국과의 관계를 관리하고 국내 역량을 축적하는 종합적 능력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yeseul@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