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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스위스가 없었으면 헤세도 없었다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2023-02-09 12:00 송고 | 2023-02-09 14:15 최종수정
칼브의 헤르만 헤세 박물관의 기념품 중 하나인 헤세 책갈피./사진=조성관 작가 
칼브의 헤르만 헤세 박물관의 기념품 중 하나인 헤세 책갈피./사진=조성관 작가 
어릴 적 나는 '영세 중립국'을 이해하지 못했다. 학교 선생님이 스위스를 설명하면서 '영세 중립국'이라고 했을 때, 나는 '영세'라는 뜻을 정확히 몰랐다. 아마 한자를 배우기 전이었던 것 같다. '영세'(永世)라는 뜻을 한자로 쓰면서 설명했더라면 충분히 알아들었을텐데. 내 머릿속에는 영세 상인의 '영세'(零細)만이 완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렇게 '영세 중립국'이 '시계 정밀공업'보다 먼저 스위스의 국가 이미지로 내게 각인되었다. 내가 '영세 중립국 스위스'를 실감한 것은 천재를 연구하면서다. 스위스가 없었더라면 그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이 1년을 넘기면서 우리는 지금 여러 가지 변화를 실감하는 중이다. 피부로 느끼는 생활물가에서 국제 정세의 변화까지 정말 다양하다. 국제 정세의 흐름에서 주목할 대목은 유럽의 일부 국가가 중립국 지위를 포기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신청했다는 사실이다.

스웨덴과 핀란드가 이미 지난해 5월 NATO 가입을 신청한 상태지만 두 나라의 가입 신청은 튀르키예의 반대로 현재까지 보류 중이다. NATO 가입은 회원국(30개국)이 만장일치로 승인해야만 이뤄진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스칸디나비아 3국 중 노르웨이만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1820년대에 이미 중립국을 선언한 스웨덴은 1·2차세계대전의 포연(砲煙)에서 비켜설 수 있었다. 핀란드의 경우 소련이 일부 지역을 잠시 점령하기도 했지만 거센 저항으로 소련군을 격퇴했다. 핀란드는 2차 세계대전 후 중립국을 선언한 경우다.
헤세를 세계적 작가로 키운 스위스

나는 '독일이 사랑한 천재들'에서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프리드리히 니체, 헤르만 헤세, 리하르트 바그너, 마를레네 디트리히 다섯 사람을 다뤘다. 그런데 헤세, 니체, 바그너 세 사람을 연구하다 보니 이들이 모두 스위스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

스위스는 종교전쟁(일명 30년 전쟁)의 결과로 네덜란드와 함께 세계지도에 이름이 등장한 나라다. 그 스위스가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을 겪고 나서 국가 존속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 중립국 선언이었다.

벨기에는 1830년 네덜란드에서 독립하며 세계사에 나타났다. 벨기에 역시 뼈저린 역사를 통해 중립국을 선언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침략당하면서 벨기에를 중립국으로 보장한다는 조약은 휴지 조각이 되었다. 벨기에는 2차 세계대전에서도 또 한 번 나치 독일에 유린당했다.
바젤의 독일 지역에 세워진 프랑스-스위스 국경 이정표. 이 방향으로 가면 3국의 영토를 지나는 보행자 전용교가 나온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사진=조성관 작가 
바젤의 독일 지역에 세워진 프랑스-스위스 국경 이정표. 이 방향으로 가면 3국의 영토를 지나는 보행자 전용교가 나온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사진=조성관 작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세계문학 작가 중 한 사람이 헤르만 헤세(1877~1962)다. 독일 칼브가 고향인 헤세는 스물두 살 때인 1899년 스위스 바젤로 와서 고서점에 취직했다. 바젤은 라인강을 사이에 두고 스위스·프랑스·독일 3국이 국경을 맞댄 도시.

바젤 시절 발표한 첫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가 호평을 받았다. 전업작가의 길을 걷던 중 사진작가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하면서 스위스에 깊게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는 신혼생활을 시작한 가이엔호펜에서 1906년 발표한 '수레바퀴 아래서'로 작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헤세는 대사관을 통해 독일군에 자원했지만 고령이라는 이유로 소집 면제 판정을 받는다. 똑같은 현상이라도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가치가 달라진다. 그는 중립국에서 1차 세계대전을 지켜보았다. 헤세는 독일 신문들이 맹목적인 애국주의를 부추겨 독일 청년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것이 독일 정부의 비위를 거슬렀고, 그의 작품들은 독일 전역에서 판금된다.

이즈음 설상가상으로 아내와 셋째 아들이 잇달아 정신질환이 발병하면서 가정과 사회에서 심각한 상태에 빠진다. 그는 취리히대학의 정신분석학자 칼 융을 찾아간다. 융에게서 정기적으로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받는다. 융의 권유로 붓을 잡았고, 조금씩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온다. 정신분석 심리치료 중 영감을 받아 쓴 작품이 '데미안'이다.

헤세가 세 번째로 바젤을 찾은 것은 1924년. 부인과 이혼한 상태에서 아들은 여전히 정신병원에 있었다. 극심한 우울증에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 현실을 잊으려면 새 작품에 매달리는 방법 밖에 없었다. 라인강이 보이는 크라프트 호텔에서 깊은 밤 레밍턴 포터블 타자기를 두드렸다. '황야의 이리'는 이렇게 태어났다.
헤르만 헤세가 장기투숙하며 '황야의 이리'를 쓴 호텔 크라프트. /사진=조성관 작가 
헤르만 헤세가 장기투숙하며 '황야의 이리'를 쓴 호텔 크라프트. /사진=조성관 작가 
히틀러가 집권하자 그는 나치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나치는 곧바로 그의 작품들은 금서로 묶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그의 곁에는 사랑하는 아내 니논(Ninon)이 있었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몬타뇰라 숲속에서 '유리알 유희' '동방 순례' 등을 써냈다. 몬타뇰라에서 그는 나치를 피해 스위스로 망명하는 독일 작가들의 정착을 지원했다. 토마스 만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헤세의 도움을 받았다. 스위스가 없었으면 헤세도 없었다.

작센왕이 스위스로 자객을 보냈더라면


헤세보다 시대가 앞선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 그 역시 스위스가 없었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을 인물이다. 바그너처럼 이십 대 10년 세월을 가난에 찌들어 본 예술가가 또 있을까.

생활고로 야반도주까지 하며 파리에서 궁핍에 시달리다가 처음으로 따뜻한 밥을 먹기 시작한 곳이 드레스덴이었다. 작센 왕국의 궁정악장이 되면서 그는 안정적인 생활을 한다. 하지만 1849년 드레스덴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의 배후로 지명 수배를 받으며 안락한 생활은 산산조각이 난다.

그가 리스트의 도움을 받으며 바이마르로 피신했다가 경찰의 추적조를 피해 최종적으로 선택한 도피처가 스위스였다. 이렇게 시작된 망명 생활이 13년간 이어진다. 바이마르 왕국의 젊은 왕 루트비히 2세가 루체른으로 극진한 초청장을 보낼 때까지 말이다. 상하이로 자객을 보내 김옥균을 암살한 민비(명성황후)처럼 작센의 왕이 스위스로 킬러를 보냈더라면 바그너는 어찌 되었을 것인가.

니체 사상의 팔할은 알프스에서 잉태되었고 알프스에서 쓰였다. 이십 대 중반부터 두통과 정신질환을 앓아온 니체는 발작이 시작되면 황급히 알프스로 들어갔다. 알프스는 가엾은 니체를 보듬고 쓰다듬었다. 그리고 창작의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알프스가 없었으면 그는 진작에 미쳐서 죽었을 것이다. 단언컨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태어나지 못했다.
스위스 루체른 호수 전경. /사진=위키피디아 
스위스 루체른 호수 전경. /사진=위키피디아 
프레디 머큐리가 사랑한 도시

2차 세계대전 후 스위스는 전 세계 작가와 예술가들의 로망이 되었다. 스위스는 더 이상 압제를 피해 몸을 숨기는 공간이 아니었다. 휴식을 취하며 고갈된 감성을 채우고 창작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곳.

내가 스위스에서 가장 가보고 싶어 한 도시는 바젤과 루체른과 몽트뢰다. 니체와 헤세와 부르크하르트의 도시 바젤. 삼국이 국경을 맞댄 도시의 흙과 바람과 강내음은 한번 맡아보았다. 이제 남은 곳은 레만호의 몽트뢰(Montreux)와 루체른이다.

재즈 마니아들에게 몽트뢰는 버킷리스트에 들어간다. 몽트뢰 재즈페스티벌! 1967년에 시작되었으니 비록 역사는 짧은 편에 속하지만 단시간 내에 세계적 재즈페스티벌로 자리를 굳혔다. 도대체 무슨 배경에서?
2005년에 세워진 몽트뢰의 프레디 머큐리 동상. /사진=위키피디아 
2005년에 세워진 몽트뢰의 프레디 머큐리 동상. /사진=위키피디아 
퀸과 프레디 머큐리, 데이비드 보위, 딥 퍼플, 레드 제플린 등 세계의 톱 뮤지션들이 사랑했던 곳 몽트뢰. 스트라빈스키가 '봄의 제전'을 작곡한 곳도 몽트뢰였고, 톨스토이와 안데르센이 머물며 글을 썼던 곳도 몽트뢰였다. 작가와 예술가와 음악가들은 레만호 산책길을 걸으며 자유를 흡입했다.

몽트뢰는 '마운틴 스튜디오'의 고향이다. 퀸의 프로듀서가 '마운틴 스튜디오'를 사들인 이후 퀸은 1980년대 여러 차례 몽트뢰에 와서 녹음을 하곤 했다. 프레디가 마지막 음악 작업을 한 곳도 이곳이다. 프레디에게 몽트뢰는 제2의 고향이었다. 몽트뢰는 2005년 프레디를 기려 레만호 변에 프레디의 동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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