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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영의 쫌아는 언니] 이런 사람에 욕심 난다

(서울=뉴스1) 안은영 작가 | 2021-10-20 07:15 송고
초겨울 날씨가 이어진 19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광장 앞 화단에 빗방울이 맺혀있다. 2021.10.19/뉴스1 © News1 조태형 기자

맨발로 책상 앞에 앉았다가 서랍에서 낡은 발목 양말을 꺼내 신었다. 니트 재질의 파란색 폴로 양말인데 수십 번 빨아서 보풀이 사방에 피었다. 유난히 발이 찬 편이라 어릴 적부터 책이나 TV 동화를 볼 때면 양말을 제대로 신었나부터 확인했다. 주인공이 춥지 않기를 바라서다.

내가 신은 파란 양말은 흔들의자에 앉아 돋보기를 쓰고 뜨개질하는 안데르센 동화 속 할머니를 떠올린다. 앙상한 발목을 미처 가리지 못한 채 바닥에 흘러내린 낡은 양말은 그니의 삶에 반짝이는 순간은 있었을까 싶게 검소하다 못해 초라했다.
 
64년만의 가을한파가 물러가고 기온은 서서히 올라 15도를 찍은 10월 한낮에 굳이 오래된 양말 두 짝을 찾아 서랍을 뒤졌다. 막상 발견하고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후줄근한 양말에 발을 뀄다. 내가 찾은 것은 양말 두 짝이라기보다 심신을 달래줄 오랜 물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온수매트나 난방보일러처럼 동력기반의 즉각적인 것이 아니라 사소하고, 낡고, 따뜻해서 그 자체로 완벽한 온기. 몇 번이고 아파트 의류수거함에 갈 뻔한 운명을 구한 것도 제 스스로 가진 이 온기 때문이었다. 

올 초 김장김치가 맛없어질 무렵 엄마가 파김치, 갓김치, 배추김치 3종 세트를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 다라이(!) 부쳐왔다. 만두만 먹었던 오대수처럼 김치를 다 먹어갈 즈음 각 앙념의 염도를 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울엄마 김치 애호가인 후배가 생각났다. 집에 있는 대용량 김치통에 김치3종을 채워 갖다 주고 나서야 냉장고에 틈이 생겼다. 얼마 뒤 후배가 퇴근길에 불쑥 집으로 찾아왔다. 선물이 차곡차곡 담긴 김치통을 쓱 밀어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울엄마가 나를 못 알아보기 시작했다거나, 잠이 안 올 때는 언니네 엄마 김치에 혼술하고 잤다거나, 가끔 정신이 돌아오면 엄마가 멀쩡했던 때처럼 웃어주신다거나 하는 이야기. 후배 어머니는 중증 치매에 여러 합병증을 앓고 계셨다. 

한동안 코로나 때문에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후배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잘못한 사람처럼 가슴이 몹시 아팠다. 경황없는 시간이 흐르고 시내 국시집에서 점심을 먹는데 반찬으로 겉절이가 나왔다. 엄마의 김치로 얘기로 흘러서 내가 '오래된 김치통 버리고 말지... 다신 뭐 담아오지 마'라고 했다. '빈 그릇으로 돌려주는 거 아니라고 배워서 그래, 옛날에 울 엄마한테...' 그날 점심은 시간지나 불어버린 국수가락처럼 끊이지않고 자주 목이 메었다.  
  
살면서 느끼건대 내가 습관을 만든 것도 맞거니와 어느 순간부터는 그 오랜 습관이 나를 켜켜이 만들어가는 것도 같다. 빠르게 물이랑을 휘돌 때는 내가 격렬하고 파워풀한 삶을 이끌어가는 것 같았다. 앞 물결을 허겁지겁 좇은 것이지 내가 이끌어 물길을 낸 것이 아니라는 자각은 한참 지나서 찾아온다. 그러다보니 낡고 오래된 것들 가운데 꼭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긴다. 취향이니 스타일이니 세련되고 멋진 포장을 걷어내면 본래의 내가 거기 있다.

함께 시간을 보낸 생물과 무생물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것들을 볼 때 어떤 마음이 드는지 찬찬히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것들과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나는 이런 것, 이런 사람에 욕심이 난다. 내가 오래 지니고 있어서 나를 닮은 것(사람), 여러 생각을 잠재워 나를 순하게 하는 것(사람), 이미 잃은 것 많았으니 앞으로는 절대 잃고 싶지 않은 것(사람). 2021년 10월, 내 욕망은 이렇게 무르익어간다. /안은영 작가

©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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