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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좋은 경험', 악녀와 천사 사이를 오가는 다리 [N리뷰]

(서울=뉴스1) 정유진 기자 | 2021-07-02 17:30 송고 | 2021-07-02 17:36 최종수정
'죽어도 좋은 경험' 스틸 컷 © 뉴스1
'죽어도 좋은 경험' 스틸 컷 © 뉴스1

*영화의 주요 내용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죽어도 좋은 경험: 천사여 악녀가 되라'(이하 '죽어도 좋은 경험', 감독 김기영)의 때늦은 개봉은 주연 배우 윤여정 덕분이다. 윤여정은 지난 4월 미국에서 열린 제93회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할 당시 자신의 데뷔작 연출자였던 고(故) 김기영 감독을 언급해 화제가 됐다. 이후 김기영 감독의 대표작이자 윤여정의 대표작이기도 한 '화녀'(1971)와 '충녀'(1972) 등이 재조명을 받았고, 이는 두 사람이 함께 한 세번째 작품 '죽어도 좋은 경험'(1990)의 개봉으로까지 이어졌다. '죽어도 좋은 경험'은 1990년 제작됐으나 김기영 감독이 세상을 떠난 1998년까지도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을 제외하고는 정식으로 개봉한 적이 없었던 미개봉작이다. 필름 원본은 김기영 감독의 자녀들이 보유하고 있었던 것인데, 배급사를 통해 4K로 리마스터링된 후 31년만에 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나게 됐다.
최근 언론배급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죽어도 좋은 경험'은 김기영 감독 특유의 기묘한 개성이 집약된 범죄 영화였다. 파격적인 전개와 30여년 전 중년에 들어선 윤여정의 농익은 연기력, 산업화가 절정에 이른 80~90년대 서울의 시대상 등을 보고 읽어내는 데서 얻는 재미가 있다.

영화는 결혼 5년차 주부 명자(이탐미 분)가 운전 연습을 하기로 하면서 시작된다. 운전 연습장에서 그는 두 여성, 여정(윤여정 분)과 길자(조주미 분)를 알게 된다. 길자와 여정은 운전 연습 중 접촉 사고를 일으키게 되는데, 흥분해 욕을 하며 여정을 밀어버리는 길자의 모습을 보고 명자는 두려움을 갖는다. 그러던 중 길자는 동네 마트에서 장을 보는 명자에게 접근한다. 딸을 시켜 자신의 지갑을 명자의 장바구니에 넣은 후 그를 소매치기로 몰아붙이려는 속셈이다. 대책 없이 당하고 있는 명자 앞에 여정이 나타나 길자를 쫓아낸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편이 된다.

어느날 외출 후 집에 돌아온 명자에게 남편(김병학 분)이 다짜고짜 이혼 서류를 내민다. 명자가 5년간 아이를 낳지 못한 데다가 동네에서 소매치기를 한다는 소문이 있어 집안 망신을 시킨다는 이유다. 시부모까지 대동한 상황. 남편은 "쫓겨날 수 없다"는 명자의 머리채를 잡고 욕설을 내뱉으며 폭행을 시작한다. 물고문까지 당하는 모욕을 겪은 후에야 명자는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다. 사실 남편은 오래 전부터 술집 마담인 길자와 내연의 관계였고, 길자와의 사이에서 이미 세 딸을 낳은 상태였다. 길자는 명자의 남편을 종용해 정관 수술을 받게 했고, 명자가 여태 아이를 낳지 못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이혼 후 절망에 빠진 명자는 방황한다. 여정은 그런 명자를 데리고 다니며 향락(?)을 알려준다. 하지만 천사 같은 명자는 몸도 마음도 누군가에게 주지 못한 채 슬퍼할 뿐이다. 여정에게도 슬픈 사연은 있다. 과거 여정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남편(현길수 분)의 실수로 아들을 잃고 말았다. 이후 여정은 남편에 대한 원망을 풀 수 없었고 불감증에 걸린 채 남편 아닌 다른 남자들과 정사를 나눠왔다. 누군가 자신에게 아이를 낳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여정의 남편은 매일 밤 그런 아내를 미행한 후 아내의 내연남들에게 복수를 거행한다. 고통스러워 하는 명자를 위해 여정은 길자를 죽여주겠다고 한다. 남편에게 사고가 났다는 거짓 전화를 받고 세 딸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가던 길자는 자동차 앞유리에서 터진 빨간 잉크병 때문에 사고를 낸다. 그로 인해 네 모녀가 모두 세상을 떠난다. 이후 명자는 길자 만이 아닌 아이들까지 죽어버렸다는 죄책감에 고통받는데, 여정으로부터 여정의 남편을 죽여달라는 교환 살인 요청까지 받게 된다.
'하녀'와 '화녀'를 비롯한 김기영 감독 대표작의 공통점은 하녀와 주인 부부로 나뉘는 계급의 차이와 그로 인한 갈등을 다룬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그런 계급 갈등을 확인하기 어렵다. 대신 '죽어도 좋은 경험'은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산업화, 도시와의 성공 후, 자유와 욕망을 추종하는 자본주의의 가치관과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 사이에 놓인 '다리'를 오가는 여성들의 방황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 속에서 시시때때로 기괴한 소음과 함께 등장하는 올림픽대교는 영화의 제작 시점(1990년)쯤에 지어진 최신식 교각으로, 당대의 가장 현대적인 건축 작품이었다. 세 여성이 모두 이제 막 운전을 배운 '초보 운전자'인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자동차는 전적으로 핸들을 잡고 있는 사람의 의지대로 움직인다. 이 초보 운전자들은 남성의 그늘 아래 자신의 의지없이 살아가던 전근대적 삶을 벗어나 인생의 핸들을 손에 쥐게 된, 새로운 시대를 향해 질주하는 현대 여성을 상징하는 듯 하다. 그들은 새로운 가치관을 향해 달려가지만, 또한 자석에 이끌리듯 다시 기존의 가치관으로 돌아오게 된다. 올림픽대교 위를 오락가락하는 차들처럼, 여자들은 가치관의 충돌이 일어나는 현실을 혼란스럽게 오간다. 

세 명의 여성은 천사와 악녀로 분류된다. 남편이 있음에도 여러 남자와 혼외 정사를 즐기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술책과 협박을 망설이지 않는 여정이나 길자는 '악녀'처럼 보인다. 반면 남편하게 처절하게 배신을 당하고도 "이대로 쫓겨날 수 없다"며 전통적 여성상을 유지하는 명자는 천사처럼 비쳐진다. 하지만 천사와 악녀로 분류되는 세 여자는 '2세에 대한 집착'이라는 속성을 공유한다. 영화 속 남자들에는 명확한 직업이 있다. 명자의 남편은 생명보험회사의 보험 상담원이며 여정의 남편은 공장을 운영하는 사업가다. 술집을 운영하는 길자를 제외한 주인공 두 여성은 직업이 없으며 오로지 자식의 유무로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다. 자식은 '남자의 생명을 담은 존재'다. 여자들은 자식을 원하며 자식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받는다. 아들이 죽은 후 불감증에 걸린 여정, 자식을 낳지 못해 버림받고 괴로워하는 명자의 모습이 그 같은 가치관을 반영한다. 길자 역시 직업이 있지만 불륜으로 이룬 자신의 가정을 지키려는 열망으로 가득찼으며, 언제나 세 딸을 자랑스럽게 앞세우는 그의 태도에서 왕성한 생산력을 자랑하는 여성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영화의 말미 천사는 타의에 의해 악녀가 되는 길을 택한다. 협박 때문에 죽을 힘을 다해 악녀의 길을 걷는 명자의 모습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결말이 가장 의아스럽다. 악녀들의 말로는 불행하지만, 가까스로 악녀의 탈을 쓰고 있던 천사는 아내의 자격과 천사로서의(?) 지위를 재획득한다. 이 모든 전개 아래에는 이를 가능하게 한 남자들의 희생과 허용이 깔려있다. 억지스러운 '해피 엔딩'이다. 시대적 한계인지, 감독이 의도한 연출인지를 명확하게 알기는 어려우나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청소년관람불가인 '죽어도 좋은 경험'에서는 김기영 감독 특유의 에로티시즘 가득한 미장센이 돋보인다. 비약 가득한 전개와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몽타주 기법은 물 흐르듯 흘러가는 할리우드식 편집에 익숙한 현대 관객들에 민망한 웃음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죽어도 좋은 경험'은 그 시대를 살아갔던 거장의 특별한 시선과 개성을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러닝타임은 95분이다. 오는 15일 개봉.


eujenej@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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