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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 위해 택배 시작한 화가 "배송하며 그림 소재 찾고 건강도 되찾았어요"

[인터뷰]'한진 택배기사' 이현영 작가
"전국의 택배기사에게 조금이나마 용기가 됐으면"

(서울=뉴스1) 문대현 기자 | 2021-06-02 06:40 송고
6일 오전 서울 중구 서소문로 대한항공 빌딩 내 일우스페이스에서 열린 '우리 생애의 첫 봄' 전시회에서 조현민 한진 부사장과 신입사원들이 한진 소속 택배기사 이현영 작가와 올해 94세 맞은 그의 어머니 김두엽 작가에게 카네이션을 선물하고 있다. 2021.5.6/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6일 오전 서울 중구 서소문로 대한항공 빌딩 내 일우스페이스에서 열린 '우리 생애의 첫 봄' 전시회에서 조현민 한진 부사장과 신입사원들이 한진 소속 택배기사 이현영 작가와 올해 94세 맞은 그의 어머니 김두엽 작가에게 카네이션을 선물하고 있다. 2021.5.6/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택배 배송 도중 바깥 풍경을 보며 그림의 소재를 찾을 때면 행복해집니다. 제게 택배 일은 그림을 위한 여행이자 즐거운 노동입니다"  

점묘화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이현영(52) 작가의 말이다. 그에게는 화가 외에 직업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택배기사(한진택배)다. 그는 생계를 위해 택배 일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생계 그 이상의 의미다. 일평생 그림만 그려오던 그에게 택배 일은 건강을 되찾는 운동이 됐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영감을 주는 활력소가 됐다.
이 작가는 그의 고향 전남 광양에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작품활동과 택배 일을 계속 병행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자신의 상황에 맞게 배송 물량을 조절하는 등 균형을 맞추고 있다.

최근 이 작가는 한진그룹 일우재단의 도움을 받아 서울 한복판에서 '모자전:우리 생애의 첫 봄'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의 모친인 김두엽씨(94)와 함께 해 그 의미가 더 남달랐다.   

전시회는 지난달 말로 끝났지만 여운을 아직 남아 있다. 광양으로 다시 내려간 그에게 작가 겸 택배기사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됐다.
◇개인전 4회, 초대 모자전 13회에 이르는 작가, 택배기사가 되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미술에 소질을 발견하고 화가로서의 꿈을 키워왔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대학 진학 대신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조선소에서 녹을 제거하는 일부터 해서 △벽돌 공장의 직공 △세탁소 내 빨래 △민속주점 서빙 △목욕탕 수건 빨래 △도시락가게 동업 등 그야말로 안해본 일이 없었다. 그는 일을 하는 상황 속에서도 미술을 놓지 않고 계속 입시에 매달렸지만 4번이나 떨어지며 좌절을 맛 보기도 했다.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었던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장의 생계 문제가 가장 중요했죠"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미술을 위해 하던 도시락가게를 접었고, 이윽고 29살에 추계예술대학교에 97학번 신입생이 될 수 있었다. 동기들보다 9살이나 많은 만학도가 된 것이다. 그러나 나아지지 않는 형편에 두 번이나 휴학을 해야 했고 2003년이 돼서야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졸업 이후에는 그의 특기를 살려 서울 망원동, 홍대 등지에서 미술 학원을 운영했다. 그가 가르친 제자들이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같은 이름 있는 곳에 진학할 때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이 없었다. 다만 학원을 운영하다 보니 본인 작품을 그릴 여유가 되지 않았고, 2011년 모든 일을 정리하고 고향인 광양으로 내려갔다.

광양에서는 무엇보다 본인의 작품 활동에 집중했다. 2015년 '이현영 개인전' 2회, 2017년 '섬진강-흐르는 강물처럼', 2018년 '이현영 특별 초대 개인전' 등 모두 네 차례 개인전을 개최하고 아홉 차례 단체전에도 참가하는 등 작품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 작가는 이 과정에서도 생계를 위해 컨테이너박스 고박 작업, 산림관리계원 등 생계를 위한 일을 해야만 했지만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할 수 있어 좋았다. 특히 그의 모친 김두엽 할머니가 2010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후 광양, 고흥, 순천, 여수 등 각지에서 모자전을 13회나 열기도 했다.

50대 아들과 80대 노모의 모자전은 그 자체로 화제가 돼 2019년 KBS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에 소개되기도 했다. 

택배 배송을 하고 있는 이현영 작가의 모습 (한진 유튜브 영상 화면 캡처)
택배 배송을 하고 있는 이현영 작가의 모습 (한진 유튜브 영상 화면 캡처)

◇2018년 우연히 시작한 택배…"못할 일 뭐 있겠나" 과감한 도전

이 작가가 택배기사 일을 시작한 것은 2018년쯤이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각종 광고에서 택배기사를 모집한다는 것을 보고 생계를 위해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 한진택배 소속 택배기사가 됐다.

이전까지 이 작가의 건강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릴 때는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고, 당연히 운동을 할 여유도 없었다. 잦은 흡연도 그의 건강을 가로 막았다.

그렇지만 '사나이가 생계를 위해 무슨 일이라도 못하랴'는 마음을 먹고 택배 일에 뛰어들었다. 초기에는 하루 배송 물량을 300개 정도 잡고 시작했는데 준비 안 된 몸이 성할리 없었다.

제 시간에 물량을 배송하지 못해 새벽 3시까지 일을 한 적도 있었고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무릎이 퉁퉁 부었다. 이 작가의 고통을 곁에서 바라보던 모친은 당장 일을 그만두라고 성화였다. 

하지만 택배를 수령하는 손님이 건네주는 시원한 음료 한 잔, 따뜻한 커피 한 잔이면 모든 고통이 싹 잊혀졌다. 특히 지역의 특성상 택배 배송을 다니며 만나는 자연의 풍경은 이 작가의 그림으로 재탄생했다. 이 역시 이 작가가 육체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이렇게 1년, 2년 경험과 노하우가 쌓였고 자연스레 운동 효과를 보면서 잃었던 건강을 되찾았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헉헉'대던 증상도 서서히 사라졌고, 하체에 근육이 붙으며 튼튼해졌다.

이 작가는 본인의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 배송 물량을 초반보다 절반 가량 줄였다. 그만큼 수입은 줄었지만 당장의 돈보다 건강과 그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되찾았다.

서울 중구 일우스페이스에서 열린 이현영 작가 '모자전'에서 관람객들이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 뉴스1 문대현 기자
서울 중구 일우스페이스에서 열린 이현영 작가 '모자전'에서 관람객들이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 뉴스1 문대현 기자

◇한진家의 관심…일우재단 통해 초청 전시회 개최까지 

이 작가는 한진 본사 1층에 있는 일우스페이스에서 '모자전'을 열면서 다시 조명을 받았다. '일우'는 故 조양호 한진 회장의 호다. 이 작가는 모자전을 열 차례 이상 경험한 적이 있지만 서울에서 개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이명희 고문께서 인간극장을 보시고 따님인 조현민 부사장께 '우리 회사의 직원이니 전시회를 열도록 도우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이후 일우재단에서는 저와 어머니를 초청해 전시회를 열어줬습니다"

지난달 6일에는 조현민 부사장이 관계자들과 전시회 기념행사에 직접 참여해 김 할머니에게 꽃다발을 선사했다.

한진은 이 작가에게 전시회를 준비하라고 한 달간의 유급 휴가를 선물하기도 했다. 이 작가는 작업 마감시간에 시달리며 한동안 밤 늦게까지 작품을 준비해야 했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모자전을 여는 것이 마냥 좋았다. 그 결과 이 작가와 모친의 작품 150여점이 전시됐다.

이 작가는 "한진의 지원이 없었다면 서울에서 큰 전시를 연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회사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와 함께 뜻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돼 큰 영광"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기자가 직접 전시장을 방문했을 때 봄의 내음이 확 느껴졌다. 이 작가의 이번 전시 대표 작품들은 '봄'이라는 주제에 맞게 '봄이 오는 마을'(2021년), '나의 첫봄'(2021년), '붉은나무'(2019년) 등이다.

모친 김 할머니의 작품에는 이 작가 가족의 아름다운 순간이 작품 곳곳에 담겨 있었다. 마을을 배경으로 어머니인 자신과 아들인 이 작가, 그리고 며느리가 나란히 앉아 봄내음을 느끼는 모습이 그림 속에 표현돼 있었다.

서울 중구 일우스페이스에서 이현영 작가의 모자전이 열렸다. © 뉴스1 문대현 기자
서울 중구 일우스페이스에서 이현영 작가의 모자전이 열렸다. © 뉴스1 문대현 기자

◇"내게 택배는 그림을 위한 여행…택배기사들, 용기를 가지길"

이 작가는 최근 광양 집 마당에서 작은 연못을 만들다 허리를 다쳐 최근 수술까지 받았다. 몸이 회복되는대로 다시 택배 일을 재개할 계획이다.

그에게 택배란 생계와 동시에 그림을 위한 여행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리는 게 이 작가의 가장 큰 인생 목표다.

이 작가는 "아내는 내가 스스로 노동해서 먹고 사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한다. 고된 일이지만 나를 인정해 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며 "몸이 회복되는대로 택배 일을 다시 하면서 좋은 작품을 위해 노력하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전국의 택배기사 일을 하는 동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도 남겼다. 최근 서울 강동구 등 대도시 일부 지역에서는 택배 차량의 아파트 진입 문제로 아파트 입주민과 택배기사의 갈등이 격화되는 등 택배 이슈가 지속적으로 불거지는 상황이다.

이 작가는 "택배와 관련된 각종 사회적 이슈들이 바르게 해결됐으면 하는 마음"이라며 "전국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택배기사들이 꿈을 위해 일을 하는 나를 보고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또한 그들도 택배 외에 또 다른 꿈을 품고 일을 하면 더욱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까"라고 웃었다.


eggod6112@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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