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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수에즈운하에서 파나마운하까지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2021-04-08 12:00 송고 | 2021-04-08 16:34 최종수정
홍해에서 본 수에즈운하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홍해에서 본 수에즈운하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암스테르담, 상트페테르부르크, 베네치아. 세 도시의 공통점은 두 가지다. 무역항이면서 운하가 발달한 도시라는 점이다. 암스테르담은 운하가 실핏줄처럼 도시를 연결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쓸모없는 습지에 제방을 쌓아 만든 도시다. 이 과정에서 운하가 만들어졌다. 베네치아는 수심이 낮은 바다에 나무 기둥을 촘촘히 박아 그 위에 건설한 도시다. 세 도시를 느끼려면 무엇보다 운하 여행을 해봐야 한다.
 
페르디낭 드 러셉스    

그러나 운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수에즈운하다.
1869. 190. 12. 19000. 51.

1869년은 수에즈운하가 개통한 해다. 190㎞는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수에즈운하의 길이. 12%는 전 세계 교역량에서 수에즈운하가 차지하는 비중이다. 1만9000척은 지난해 수에즈운하를 통과한 화물선이고, 51척은 작년 한 해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하루 평균 선박 숫자다.

중국에서 출발해 네덜란드 로테르담으로 향하던 초대형 컨테이너 화물선 에버기븐 호(號)가 엿새 동안 좌초해 운하를 막지 않았으면 우리가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인도양과 지중해, 아프리카 희망봉을 번갈아 살펴볼 일이 있었을까. 또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수에즈운하를 검색할 일이 있었을까.
수에즈운하가 막히자 화물선들이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우회할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잠깐 흘러나왔다. 배가 다니는 물길을 한번 만들면 당연히 그대로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에버기븐호로 인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수에즈운하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잇달아 세 사람이 떠올랐다. 페르디낭 드 러셉스, 구스타브 에펠, 그리고 쥘 베른이다. 

페르디낭 드 러셉스(1805~1894).

그의 집안은 대대로 외교관 가문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에서 지냈다. 대학과 군 복무를 마친 그는 1825년 리스본 주재 프랑스대사관 부영사 시보로 외교관 생활 시작한다. 두 번째 임지는 튀니지 프랑스총영사관. 1832년 알렉산드리아 프랑스총영사관의 부영사로 전보된다.

유서 깊은 도시 알렉산드리아 근무 시절 우연한 사건이 벌어진다. 배를 타고 이집트를 여행하던 중 전염병이 창궐해 검역소에 갇힌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총영사에게서 받은 책과 문건들을 휴대하고 있었다. 검역을 기다리며 낡은 문건들을 살펴보던 중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1798년) 당시 작성한 문건을 발견하게 된다. 나폴레옹이 엔지니어를 시켜 만든 수에즈운하 계획서였다. 뜻밖에 접한 나폴레옹의 수에즈운하 계획서가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머릿속이 상상력으로 불타올랐다.
 
나다르가 촬영한 페르디낭 드 러셉스. 위키피디아 출처 / 수에즈 운하. 김일환 디자이너  
나다르가 촬영한 페르디낭 드 러셉스. 위키피디아 출처 / 수에즈 운하. 김일환 디자이너  

그는 1833년 카이로 프랑스대사관 영사로 승진·전보된다. 그는 1837년까지 이집트에서 근무한다.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본부에 근무한 뒤 그는 다시 네덜란드 로테르담, 스페인 말라가·바르셀로나를 거쳤다.

1850년 은퇴할 때까지 그의 25년 외교관 경력은 리스본과 로테르담을 제외하고는 모두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연안 도시였다. 프랑스 사람 중에 러셉스만큼 지정학적 관점에서 지중해와 이집트를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나폴레옹 시대 입안했다 미완(未完)에 그친 수에즈 운하의 계획이 있었다.

1854년,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이집트 근무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드 파샤가 이집트 태수에 취임한 것이다. 사이드 파샤는 러셉스의 부친과도 친교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수에즈운하 계획을 추진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파샤를 만나 수에즈운하 건설의 당위성을 설득했고, 결국 순이익의 15%를 이집트에 지불하는 조건으로 건설권과 99년의 조차권을 받는다.  

남은 과제는 자금이었다. 천문학적인 자금을 어떻게 마련하나. 러셉스는 파리에서 프랑스의 힘으로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자고 호소했다. 1805년 트라팔가 해전의 패배로 제해권(制海權)을 영국에 빼앗긴 프랑스는 수에즈운하 건설로 영국을 견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프랑스 국민이 뜨겁게 호응해 2억 프랑의 자금이 모였다.

1858년 수에즈운하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1859년 4월 수에즈운하 건설의 첫 삽을 떴다. 프랑스의 과학기술과 이집트의 노동력이 총동원되었다. 대역사에 꼬박 10년이 걸렸다. 1869년 11월 수에즈운하가 완공됐다. 나폴레옹의 후예가 70년 만에 나폴레옹의 꿈을 이뤄냈다. 한국사 연표로 보면, 고종 6년 때다.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최단 통로가 태어났다. 희망봉을 도는 300년 넘은 해상 루트는 필요가 없어졌다. 런던에서 뭄바이까지의 1만9800㎞가 1만1600㎞로 단축되었다. 석 달 걸리던 시간이 3주로 줄어들었다. 세계 역사가 바뀌었다. 영국은 식민지 인도로 가려면 프랑스가 관할하는 수에즈운하를 지나야 했다. 
 
파나마운하 지도와 운하 측면도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파나마운하 지도와 운하 측면도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에펠, 파나마 운하에 뛰어들다
 
수에즈운하 건설로 초대박을 터뜨린 러셉스는 또 다른 목표를 세웠다. 파나마 지협에 운하를 뚫자. 그래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할 수만 있다면···. 1879년 프랑스 의회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수평하게(sea-level) 연결하는 운하 프로젝트 법안을 의결했다.
 
파나마운하의 최초의 아이디어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평양을 최초로 본 사람은 스페인 건달 바스코 발보아였다. 그날은 1513년 9월 25일. 상건달이자 부랑자인 발보아는 식민지 파나마에서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발보아는 자신이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즉시 처형당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발보아는 그때 아주 우연히 원주민 추장에게서 저 산을 넘으면 광대한 바다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귀가 확 뚫렸다. 발보아는 일생일대의 결심을 한다. 콜럼버스도 못한 더 큰 발견을 해 스페인 국왕에게 바치자. 그러면 반란을 일으킨 죄를 사면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발보아는 9월1일 군사들을 이끌고 정글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적처럼 9월25일 태평양을 내려다보았다. 발보아는 파나마 지협(地峽)을 최초로 횡단한 사람으로 기록된다. 지협을 스페인어로 이스트모(istmo)라고 한다. 

1534년 스페인 국왕은 식민지인 페루까지 스페인 함대가 수월하게 항해하는 방법을 연구하라고 지시한다. 남아메리카 남단을 통과하는 위험한 길이 아닌 지협에 물길을 내는 방법.  

1668년에 영국에서 파나마운하 건설 주장이 나왔다. 1788년 프랑스 주재 미국대사 토마스 제퍼슨(후에 3대 미국 대통령 역임)은 스페인제국에 중남미에 세운 식민지 관리를 원활하게 하려면 파나마운하 건설이 필수적이라는 제안을 한다. 스페인제국은 3년간의 탐사 끝에 구체적인 운하 건설 계획을 수립한다. 그러나 스페인제국 몰락과 함께 이 계획은 폐기된다.  

이후 영국, 프랑스, 미국이 파나마운하 건설권을 탐냈다. 프랑스가 수에즈운하 성공이라는 후광에 힘입어 운하 건설권을 따낸다. 러셉스는 파나마운하 계획을 세우면서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수에즈운하는 위도 31도에 걸쳐 있고, 주변이 건조한 사막 기후다. 지중해와 홍해는 양쪽 바다의 표고차가 없었다. 흙과 모래를 파내기만 하면 됐을 뿐 물을 가두는 갑문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파나마 지협은 열대 지방에 위치한다. 러셉스는 건기(乾期) 때만 파나마 지협을 몇 번 방문했을 뿐 우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우기의 기후와 환경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에즈운하에서의 성공 공식을 파나마운하 건설에서도 그대로 적용했다. 산술적으로는 64㎞의 지협만 뚫으면 수에즈운하보다 빨리 공기(工期)를 단축해 완공할 수 있었다.        

2013년 파나마선적의 화물선이 갑문 출구를 빠져나가는 모습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2013년 파나마선적의 화물선이 갑문 출구를 빠져나가는 모습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육지를 파들어가 해수면과 수평하게 맞춘다는 계획은 얼마 지나지 않아 차질이 나타났다. 암반이 많아 난공사인 데다 기후도 공사를 도와주지 않았다. 우기인 4월부터 12월까지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비가 쏟아졌을 뿐 아니라 열대성 질병인 말라리아와 활열병이 들끓었다. 인부들이 풍토병으로 픽픽 쓰러졌다.

공사가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자금이 달리기 시작하자 러셉스는 급히 이사회 멤버인 구스타브 에펠(1832~1923)에게 SOS를 보냈다. 에펠은 1887년 설계와 건설을 책임지기로 계약했다. 에펠은 갑문(閘門) 설치로 설계를 바꿔 공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1년도 안 되어 파나마운하주식회사는 파산하고 만다. 1888년, 공사 시작 9년 만이다. 에펠 역시 투자금을 모두 날렸다. 에펠은 투자자들로부터 사기죄로 고발당해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파나마운하 스캔들이다.  

프랑스가 파다 만 파나마운하에 눈독을 들인 나라가 미국이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꿈꾼 미국은 파나마운하에 베팅을 한다. 미국은 1903년 프랑스로부터 4000만 달러를 주고 파나마운하 건설권을 사들였다. 미국은 프랑스의 실패를 거울삼아 현지 실정에 맞는 계획을 세운다. 양(兩) 대양과 지협의 표고차를 갑문을 설치하는 설계를 했다. 모든 근로자들은 풍토병 예방 접종을 한 뒤 현장에 투입됐다. 1914년 마침내 운하가 개통되었다. 이후 미국은 파나마운하 운항권을 85년간 독점 관리해왔다.

1873년에 출간된 '80일간의 세계일주' 표지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구스타브 에펠의 절친이 과학소설가 쥘 베른(1828~1905)이다. 에펠탑 4층에는 최고급 식당 '쥘 베른'이 있다. 나는 '파리가 사랑한 천재들'을 쓰면서 쥘 베른을 후보자로 놓고 진지하게 검토한 적이 있다.

쥘 베른의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장편소설이 '80일간의 세계일주'다. 1872년 파리의 한 신문에 연재된 소설이다. 수에즈운하가 개통되고 3년 뒤에 나온 소설이다. 수에즈운하가 개통되지 않았다면 애당초 구상 자체가 불가능한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가 수에즈운하 입구에서 기선을 탄다. 이 기선은 영국을 출발해 수에즈운하를 거쳐 인도로 가는 여객선이다. 기선이 수에즈운하를 통과해 홍해로 접어드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홍해는 길고 좁은 만이 그렇듯이 무척 변덕스러워, 파도가 거칠어지는 때가 많았다. 바람이 아시아나 아프리카 쪽에서 불어닥칠 때마다, 꽁무니에 스크루가 달린 물렛가락 같은 몽골리아호는 옆바람을 받아 심하게 흔들렸다. 그럴 때면 부인들은 모습을 감추고, 피아노는 잠잠해지고, 노래와 춤도 그쳤다.···"

수에즈운하의 지중해 시작점이 이스마일리아. 이곳의 수에즈운하국제박물관 앞에는 러셉스의 동상이 서 있다.


auth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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