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투키디데스' 꺼낸 시진핑…트럼프는 별 수 없다[최종일의 월드 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회담을 한 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톈탄공원(천단공원)을 찾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2026.05.14 ⓒ AFP=뉴스1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회담을 한 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톈탄공원(천단공원)을 찾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2026.05.14 ⓒ AFP=뉴스1

(서울=뉴스1) 최종일 선임기자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3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 서니랜즈에서 열린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태평양은 광활하여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대국을 모두 수용하기에 충분하다"는 유명한 외교 문구를 남겼다.

이는 기존 패권국과 새롭게 부상하는 강대국이 충돌과 대립의 '제로섬 게임'을 피하고, 경쟁 속에서도 공존과 공동 번영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당시 중국이 적극적으로 주창한 '신형 대국관계' 구상을 상징적으로 압축한 표현이기도 하다.

중국은 2010년 전후부터 미국과의 고위급 회담에서 이 개념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시 주석이 직접 언급하면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미국 일각에서는 이를 중국의 태평양 영향력 확대 의지를 드러낸 메시지로 해석하기도 했다.

반면 미국은 이 표현을 사실상 "태평양을 미·중이 나눠 관리하자는 발상" 혹은 "대만·인권 등 중국의 핵심 이익에 대해 미국이 양보하라는 요구"로 받아들였다. 미국이 신형 대국관계라는 용어 자체를 전략적으로 거의 사용하지 않은 이유다. 오바마 행정부는 오히려 '피벗 투 아시아' 전략을 통해 중국 견제에 나섰다.

이후 중국은 2010년대 후반부터 '신형 대국관계'라는 표현 사용을 줄였지만, 그 핵심 논리는 다른 형태로 이어졌다.

미·중 경쟁이 격화되면서 표현의 범위는 오히려 더 확장됐다. 시 주석은 2022년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넓은 지구는 중미 양국의 각자 발전과 공동 번영을 수용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태평양'이 어느새 '지구'로 확대됐다. 중국식 발전 모델과 정치 체제 역시 국제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한층 강하게 담겼다는 해석이 나왔다.

현재 중국이 대미 외교의 핵심 원칙으로 내세우는 것은 △상호 존중(Mutual Respect) △평화 공존(Peaceful Coexistence) △협력 상생(Win-Win Cooperation) 등 이른바 3대 원칙이다.

상호 존중은 서로의 사회 체제와 발전 모델, 핵심 이익을 인정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말자는 의미다. 평화 공존은 체제가 달라도 충돌하지 않고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논리이며, 협력 상생은 제로섬 경쟁 대신 협력을 통해 공동 이익을 창출하자는 개념이다.

셰펑 주미 중국대사는 이번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기고문에서 "새로운 시대의 미·중 관계가 상호 존중과 평화 공존, 협력 상생의 올바른 공존의 길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시 주석 역시 1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 모두발언에서 "협력하면 서로 이득을 보고, 대립하면 모두 피해를 본다"며 "우리는 적수가 아닌 동반자가 돼야 한다. 새로운 시대에 강대국이 공존할 수 있는 올바른 길을 함께 만들어 가자"고 말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시 주석은 이날 회담에서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언급하며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중미 관계라는 큰 배의 방향을 잘 잡아 올해를 중미 관계의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해로 만들고자 한다"고 밝혔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전쟁사를 바탕으로 현대 국제관계에서 '신흥 강국이 부상하면 기존 강대국이 이를 견제하면서 전쟁이 발생한다'는 개념으로 굳어진 것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다. 시 주석은 '태평양'이나 '지구'를 잇는 개념으로 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충분히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특히 이날 시 주석은 양국이 건설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를 위해 함께 나아가는 '상향이행(相向而行)'에 뜻을 모았다고 강조했다. 상향이행은 직역하면 '서로를 향해 걸어간다'는 뜻으로, 미국이 일방적으로 규칙을 정하기보다 서로의 이해관계를 인정하며 중간 지점에서 타협해야 한다는 중국식 메시지가 담긴 표현이다. 시 주석은 양국이 "건설적이고 전략적인 안정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고도 밝혔다.

시 주석은 또 대만 문제를 미·중 관계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규정하며 "이를 잘 처리하면 양국 관계는 안정을 유지할 수 있지만, 잘못 다루면 충돌하거나 양국 관계 전체를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간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중국의 이런 외교 원칙에 맞서 '미국 우선주의', '힘을 통한 평화', '상호주의 무역과 관세 압박' 기조로 대응해 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현재 이란 전쟁 장기화와 관세 정책을 둘러싼 미국 내 법적 제약 등으로 인해 중국을 압박할 수 있는 카드가 제한된 상황이다. 실제로 이번 방중을 앞두고도 중국을 강하게 자극하는 발언은 상대적으로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갈등 국면에서도 상대를 향해 "훌륭한 관계"를 강조하며 분위기를 띄운 뒤, 실무 협상에서 강한 요구를 내미는 협상 스타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정상회담 역시 미국산 제품 대규모 구매나 시장 개방 약속 등이 트럼프 대통령의 체면을 세워주는 방향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반대로 시 주석 입장에서는 미국이 중국의 외교 원칙을 수용했다는 인상을 국내외에 부각할 명분을 확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방중 3일 차인 15일에는 시 주석의 집무실과 관저가 있는 중난하이에서 차담회, 업무 오찬을 이어가며 최종 조율에 나선다. 현재로선 누가 더 남는 장사를 했는지 가리기가 결코 어렵지 않아 보인다.

allday33@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