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크루거 "美 빠진 'WTO-1' 구상…韓 등 중견국 연대 필수"
前 세계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 방한해 IGE 포럼 연설
"韓, 개방무역 성공 사례…참여만으로도 연대 현실성"
- 신기림 기자
(서울=뉴스1) 신기림 기자 = 앤 크루거 전 세계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는 25일 미국을 제외한 주요 무역국들이 기존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를 유지하는 이른바 'WTO-1' 방식의 협력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양자 협상 중심 통상정책으로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한국의 참여와 역할이 "큰 차이를 만들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크루거 스탠퍼드대 석좌 교수는 이날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세계경제연구원(IGE) 주최 포럼에서 트럼프식 양자 협상이 관세 인상과 비효율을 유발해 무역에 의존하는 한국과 같은 국가에 불리해졌다고 진단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은 국가별 양자 협상으로 가면서 WTO의 핵심 원칙인 최혜국 대우(MFN) 원칙을 사실상 무너뜨렸다"며 "이 경우 한국이 미국과 협상하더라도 다음 날 미국이 다른 나라에 더 낮은 관세를 제시할 수 있어 협상 자체의 기반이 흔들리게 된다"고 말했다.
크루거 교수는 대안으로 "다른 무역국들이 미국만 빠진 상태에서 WTO 헌장을 그대로 채택해 새로운 틀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미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빠졌을 때 나머지 국가들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을 출범시킨 것처럼, WTO도 미국이 빠진 WTO 마이너스 원(-1) 방식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크루거는 이 과정에서 한국이 핵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캐나다의 마크 카니 총리가 이미 비슷한 제안을 했지만 다소 고립돼 있다"며 "한국의 지지가 들어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카니 총리는 지난해 다보스 포럼에서 신뢰 기반 국가 간 협력을 중심으로 한 무역 질서의 재편을 촉구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크루거 교수는 "한국과 일본, 유럽연합(EU),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이 함께하면 미국은 지금처럼 개별 국가를 상대로 큰 협상력을 행사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WTO-1 구상이 반미(反美) 연대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WTO-1 구상은 미국을 배제한 대체 질서라기보다 미국에 의존하는 리스크에 대비한 일종의 보험적 협력에 가깝다.
그는 "미국을 상대로 무언가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미국 없이도 규범을 유지하자는 것"이라며 "미국은 원하면 언제든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둬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 미국과 안보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나라들과 함께 같은 규범을 지지하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다고 크루거는 설명했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과 대응 방향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크루거 교수는 이란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차질이 장기화할 경우 한국처럼 원유·천연가스 수입 의존도가 높은 나라들은 충격을 피하기 어렵다면서도 가장 손쉬운 흡수 장치는 "환율과 통화정책의 유연성"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한국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는 등 충격에 대한 적응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한국의 과거 경험도 높이 평가했다. 한국 외환위기와 이후 개방 정책을 거론하며 "개방 시장에 대한 의존을 통해 성공한 대표 사례"로 "한국 자체가 다른 나라들에 영향을 미쳐왔다"고 말했다. 또 "옳은 일을 한 나라들이 성장하고, 그렇지 않은 나라들은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면 다른 나라들도 결국 따라오게 된다"며 한국이 다시 한 번 모범사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크루거는 "단기적으로는 비관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낙관적"이라며 "개방적 다자 무역 체제를 유지하려는 나라들이 결국 더 좋은 성과를 낼 것이고, 그 나라들이 다음 질서를 이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그 선두에 설 수 있다"고 덧붙였다.
shinkiri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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