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한류 물결 속 #SEAbling이 던진 질문 [동남아시아 TODAY]
최기룡 서강대 동아연구소 연구원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가 제98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오스카)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을 동시에 받으며 2관왕에 올랐다. 지난해 제68회 그래미상 수상, 2025 멜론 뮤직 어워드와 2025 MAMA 어워드 등에서 수상하며 한국 문화가 글로벌 주류 문화로 인정받는 것에 한국인들 모두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이외에도 BTS, 블랙핑크, 스트레이 키즈, 에스파 등 3세대 및 4세대 아이돌을 중심으로 케이팝이 바야흐로 황금빛 전성기를 맞아 앞으로 더 '위로 위로 위로(Up, Up, Up)' 향해 갈 것으로 보인다.
한국 문화에 관한 관심은 이제 케이팝을 넘어 드라마, 영화, 음식, 미용, 등 다양한 분야로 확산하며 한국을 배우려는 관심으로 연결되고 있다. 한국 정부는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 세종학당재단 등 전문 기관을 통해 한류 확산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함께 배울 수 있는 세종학당은 현재 전 세계 87개국 252곳에서 운영되며, 수강생 수는 2025년 23만 명을 넘기며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외교부는 한국문화원에서 K-팝 커버댄스 대회, 한국영화제, 한식 체험 행사 등을 운영하며 공공외교로서 문화외교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이 중 동남아시아는 한류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 발표한 '2025 해외한류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 문화콘텐츠 전체 평균 소비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들은 인도네시아(34.7%), 필리핀(34.0%), 말레이시아(33.0%), 베트남(32.5%), 태국(29.5%)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한류 콘텐츠의 대중적 인기도 상위 5개국 역시 필리핀·베트남·말레이시아·인도·태국 순으로 동남아가 압도적이다. 한편 동남아 최대 이커머스 플랫폼 쇼피(Shopee)를 통해 한국 뷰티·패션 브랜드가 빠르게 확산하며 한류가 세계 시장으로 뻗어나가는 교두보 역할을 해왔다.
유례없이 많은 사랑을 받는 한류를 둘러싼 불편한 장면이 최근 말레이시아를 시작으로 동남아로 번지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 1월 31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데이식스(DAY6) 공연에서, 반입이 금지된 망원 카메라로 한국 팬이 촬영을 하자 말레이시아 팬들이 문제 삼은 것이 발단이 됐다. 이후 이른바 'Knetz'(한국 누리꾼)를 중심으로 오히려 현지 팬들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인터넷상에서 서로의 외모 비하, 음식문화 조롱, 혐오 이미지가 퍼지면서 인도네시아·싱가포르·필리핀·태국 등 동남아 각국 누리꾼들이 가세하면서 갈등은 순식간에 'Knetz 대 동남아시아' 구도로 확대되었다.
일부 Knetz는 설전에 가담한 동남아시아 팬의 SNS 계정을 추적해 이들이 한국의 이주노동자임을 확인한 뒤 개인 신상을 공개하고 집단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국에서 돈 벌면서 혐한을 한다"는 외국인을 향한 적대적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에 동남아시아 각국 누리꾼들은 '동남아시아'(Southeast Asia)와 '형제자매'(sibling)를 합친 '#SEAbling' 해시태그를 달고 하나로 뭉쳤다. 이는 2021년 태국, 미얀마, 대만, 홍콩 등 MZ 세대가 중심이 되어 중국의 민족주의에 맞서 서로의 민주주의를 응원했던 '밀크티 동맹'(Milk Tea Alliance)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서로 다를 수 있지만, 형제자매처럼 서로를 지지한다"라는 말처럼, #SEAbling 연대는 단순한 팬심에서 비롯된 불만 표현을 넘어선다.
Knetz와 #SEAbling 사이에서 벌어진 이번 일을 일부 팬들 사이의 소동으로 넘기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양한 나라와 문화의 팬들 덕분에 성장해 온 한류가, 정작 그 다양성을 만들어준 팬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여러 한국 콘텐츠 제작자들이 공개 사과를 통해 인종차별적 발언이 대다수 한국인의 생각이 아니라고 밝히며 자성을 촉구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우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인 수상자의 소감이 끊긴 것만으로도 서구의 차별적 시선에 분노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인을 향한 우리의 시선이 그것과 얼마나 다른지에 관해서는 무감각한 듯하다.
이번 사건이 말레이시아에서 벌어졌다는 점은 참으로 상징적이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를 비롯한 다양한 종족과 이슬람·불교·힌두교·기독교가 하나의 나라 안에서 수십 년째 함께 해 온 '복합사회'(Plural Society)다. 이 공존이 저절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독립 이후 서로 다른 집단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를 두고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방법을 찾으며 권력을 나눠 갖기(power sharing)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1969년 5·13 종족폭동의 상처를 딛고, 2022년에는 19개 정당이 통합정부를 구성하면서 다양성을 품는 능력을 세계에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 과정이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름'을 갈등이 아닌 정치가 풀어야 할 문제로 받아들이고, 제도 안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말레이시아의 열린 태도는 나라 안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2002년부터 운영해 온 '말레이시아 제2의 집'(MM2H·Malaysia My Second Home) 프로그램은 종족과 종교에 상관없이 외국인에게 오래 살 기회를 주고, 외국 기업의 투자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왔다. 이처럼 외부에도 열려 있는 말레이시아가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특별함이 있다. 말레이시아는 1980년대 마하티르 전 총리 때부터 서양이 아닌 아시아적 가치와 성실함을 바탕으로 나라를 발전시키겠다는 목표 아래 한국과 일본의 산업화 과정을 본보기로 삼은 '동방정책'(Look East Policy)을 나라의 전략으로 추진해 왔다. 2013년부터는 이를 발전시킨 제2차 동방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쿠알라룸푸르와 말라카 등 여러 도시에 세종학당 세 곳이 운영 중이고, 2020년에는 한국 교육부 산하 기관인 말레이시아 한국교육원(KECM)이 세워졌다. 말레이시아 정부 장학생들은 한국 대학에 입학하기 전 약 7개월간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집중적으로 배우는 INTEC 준비 과정을 반드시 거친다. 2026년에는 수도인 쿠알라룸푸르에 한국문화원이 문을 열고 한국과 말레이시아 문화와 기술 등을 교류하는 허브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다. 이렇듯 정치와 문화 전반에서 한국과 함께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여온 말레이시아였기에, 이번 사태가 던지는 시사점은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앞선 내용에서 보듯 말레이시아는 더 이상 한류의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다. 이는 말레이시아를 넘어 동남아시아 전체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케이팝은 산업 측면에서 이미 동남아를 향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YG는 태국 기획사와 함께 회사를 세웠고, SM은 인도네시아 최초의 4대 기획사 소속 아이돌을 배출했으며, 하이브는 베트남어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러나 동남아 출신 멤버를 그룹에 넣는 것이 곧 동남아를 존중하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팬을 끌어모으기 위한 시장 전략과 그 팬들을 실제로 어떻게 대하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유력 일간지 '더 스타'(The Star)는 사설을 통해 이번 사태를 단순한 팬덤 갈등이 아닌 문화적 경고음으로 읽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인종차별과 문화적 무례함이 그냥 넘어갈 경우, 한국이 오랫동안 쌓아온 신뢰가 무너질 수 있으며, 그 빈자리를 다른 나라의 콘텐츠가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온라인 갈등이 심했던 시기에 동남아시아에서 한국 콘텐츠 스트리밍 이용률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보도는, 이 지역 소비자들이 얼마나 빠르게 불만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여기에 동남아시아 내 민족주의 감정이 자극될 경우, 개인 간의 온라인 다툼이 순식간에 지역 전체의 집단 반발로 커질 수 있다는 점도 잊어선 안 된다.
#SEAbling이 던진 질문에 관한 답은 "우리는 서로 다를 수 있지만, 형제자매처럼 서로를 지지한다"에 이미 나와 있다고 생각된다. 글로벌 일류와 주류를 향한 한류가 아닌 글로벌 인류애를 품은 한류, 시장이 목표가 아닌 심장으로 흐르는 깊은 유대감을 가진 한류가 필요한 때다. 그 출발점을 오랫동안 '다름'과 함께 살아온 복합사회 말레이시아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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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에서 '가성비 관광지'와 '저임금 생산기지'로만 여겨지던 동남아시아가 뜨고 있습니다. 높은 잠재력의 소비시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미중 패권 경쟁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동남아를 모릅니다. 더욱 가깝게 지내야 하는 이웃인 동남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서강대 동아연구소 필자들이 격주로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