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TODAY] 불확실성의 시대, 싱가포르가 제시한 길

김종호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 매년 8월 9일은 싱가포르의 독립기념일이자, 국경일이다. 1965년 독립했으니 올해 60주년인 셈이다. 그에 따라 매년 싱가포르의 총리는 이를 맞아 국경일 연설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2025년 올해는 로렌스 웡 총리의 취임 후 두 번째 '내셔널 데이' 연설이 8월 17일에 있었다. 지난해 첫 연설에서는 내부 인재, 주택, 교육에 방점을 찍었다면, 올해는 국제 정치경제 환경의 불확실성과 기술 혁신의 거대한 전환기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풀어갔다.
핵심은 미국도, 중국도, 그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고, 기댈 곳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결국 믿을 것은 우리밖에 없으니 우리 기업을 키워 국가의 자생력, 지속가능성을 높여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지난 총리인 리셴룽의 경우 코로나 이전 미중 갈등에서의 균형외교를 통한 이득 쟁취, 중국이라는 든든한 시장을 기반으로 외부 요인에 촉각을 기울이는 느낌이었다면, 그 모든 것을 믿을 수 없게 된 지금, 홈 그로운 기업, 싱가포리언 탤런트의 육성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젊은 세대, 중년, 고령층 모두 관계없다. AI(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모두가 재교육해서 산업 전선에 뛰어들어 각자의 몫을 해야 한다는 결기마저 느껴졌다. 특유의 말투는 부드럽고 젠틀했지만, 언제나 그러했듯, 싱가포르의 핵심 국가 이념은 생존이다.
그렇기에 싱가포르 총리의 국경일 연설은 언제나 디테일이 살아있다. 정책을 하나하나 짚으며, 싱가포르라는 작은 도시국가가 어떻게 생존을 모색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디테일을 통해 싱가포르는 늘 주변의 파도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즉각 대응하며, 내부적 현실 인식과 엘리트들의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특히 올해에는 다섯 가지 과제를 짚었는데, 각각 경제, 청년, 고령층, 미래계획, 싱가포르 정신이다.
로렌스 웡 총리가 가장 먼저 강조한 건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 특히 미국의 관세 전쟁이다. 미국은 "해방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고율 관세를 유지하고 있고, 중국과의 충돌 역시 봉합되지 않았다. 싱가포르는 최저 수준의 10% 관세를 적용받고 있지만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불안이 있다. 확실히 싱가포르의 총리는 지금의 미국 주도 국제 정치 및 경제 질서의 불확실성을 경계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제 코가 석자인 중국이 예전처럼 든든한 대안이 되어 줄 수는 없는 것이 현 총리가 맞이한 최대의 도전이다. 싱가포르가 맞이한 이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자체적인 경쟁력을 갖추는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확연했다.
그 해법으로 총리가 내세운 것은 R&D(연구개발) 투자였다. 이미 20여 년간 연구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덕분에, 싱가포르는 바이오메디컬 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키워냈다. 앞으로는 여기에 더해 양자컴퓨팅에 막대한 예산을 투여하고, AI라는 차세대 기술에 국가적 투자를 집중함으로써 국가의 명운을 건다는 느낌이었다. 단순히 외자 기업을 모셔 와 기술을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적 기반을 확고히 함과 동시에 국내 기업이 AI를 만들어내고, 이를 산업 전반에 적용해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이다. 즉, 과거 싱가포르가 성장한 핵심 비결인 FDI(외국인직접투자) 및 다국적 기업 유치를 통한 무역 및 금융, 제조업의 발전이 아니라 자체적 과학 기술력을 키워, 싱가포르 브랜드의 AI 벤처 기업들을 육성한다는 것이다.
공공 콜센터에서 AI가 네 개 국어로 통역하고 요약하는 것, 항만에서 크레인 기사들이 원격 관리자 역할로 전환된 사례, 치과 엑스레이를 AI가 분석하는 모습 등과 같은 디테일한 예시를 들어가며, 싱가포르가 지향하는 미래의 구체적 단면을 제시했다. 결국 핵심은 AI와 혁신을 통한 전면적 생산성 제고이고, 이를 위해 정부는 기업 규제를 줄이고, 40세 이상 성인의 재교육을 지원하는 등 노동시장 전환까지 촘촘히 준비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청년에 관한 메시지는 두 가지가 강하게 남았는데, 첫째는 전자담배에 대한 단호한 태도였다. 단순 흡연이 아니라, 혼합된 마약성 물질이 문제라며 앞으로는 전자담배를 마약 범주로 규정하겠다고 밝혔다. 판매 및 유통뿐 아니라 소지 자체도 엄벌하겠다는 선언이다. 이는 단순한 보건 문제가 아니라 세대 전체를 중독의 위험에서 보호하겠다는 사회적 선언이었다. 앞으로 다양한 목적으로 싱가포르에 가시는 분들은 전자담배 소지 부분을 유의하여 봐야겠다.
둘째는 교육 현장의 AI 문제였다. 단순히 챗GPT 같은 AI 도구에 의존하면, 사고력과 창의성이 무뎌진다는 문제의식 및 우려를 드러내었다. 그래서 10대 학생 교육에서 이를 금지할 수는 없겠지만, AI를 비판적으로 활용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핵심이라고 했다. 실제로 어떤 교사가 AI가 작성한 글을 학생들에게 비판 및 수정하게 한 사례, 또 다른 교사가 중국어 학습용 챗봇을 직접 만들어 학생들이 연습하도록 한 사례와 같은 예시를 들면서 결국 AI 시대에 필요한 건 기술 자체보다 '어떻게 쓰느냐'라는 태도와 훈련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학생들이 AI 확산 이후 스크린만 보는 습관을 가지게 될 것을 우려하면서 초등 교육에서는 자연과 더불어 지내는 야외 활동을 강조했는데, 전 세계에서 가장 경쟁적인 초등교육을 지향하는 싱가포르에서 가능할지는 불확실하다고 보여진다.
싱가포르는 내년이면 초고령사회로 들어간다고 한다. 문제는 기대수명이 84세인 반면, 건강수명은 75세인 것. 즉, 평균 10년은 병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얘기다. 아마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싱가포르 정부는 'Healthier SG'를 통해 예방 중심의 주치의 제도를 강화하고, 'Age Well S'를 통해 노인친화적 주거환경과 활동성을 높이고자 한다.
특히 흥미로웠던 건, 커뮤니티 케어 아파트(한국으로 치면 실버타운이나 요양원 같은 개념) 같은 새로운 모델보다, 대부분의 노인이 익숙한 동네에서 노년을 보내고 싶어 한다는 점을 인정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Age Well Neighbourhoods'라는 개념이다. 토파요 같은 지역에서 거점센터를 확대하고, 가정 기반 돌봄 서비스를 늘리며, 병원과 연계된 커뮤니티 헬스 포스트를 도입하는 방식이다. 이는 싱가포르식 재택 노후 돌봄의 본격화라 할 수 있는데, 아마 싱가포르에서 활동하는 30만 명에 가까운 외국인 가사도우미의 돌봄 서비스 활용 방안을 고민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이 부분 연설에서 흥미로웠던 대목은 우드랜즈 개발 계획이었다. 기존 우드랜즈 지역 이미지는 말레이시아와의 국경에 위치해 있어 오래된 주공 아파트가 많고, 조금은 낙후된 지역이라는 것이었는데, 말레이시아 조호르 바루와 맞닿은 국경 지역인 우드랜즈를 확장해 단순한 국경 관문이 아니라 초국경 경제권(SEZ)으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코즈웨이 고속도로로만 연결된 이 구역은 아마 세계적으로도 가장 인구이동이 많은 지역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조호르 바루에 주거하면서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말레이계, 중국계, 기타 외국인들이 매일 모여들어 교통체증이 심각한 곳이기도 하다. 싱가포르에서의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당수 한국인들 역시 그렇게 오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매일 출퇴근 시간에 벌어지는 대량 이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국경 검문소를 5배 규모로 확장하고, 이 두 지역을 연결하는 전철인 'RTS Link'를 통해 양국 전철이 직접 연결될 예정이다.
또한, 앞으로 싱가포르에서 출발할 때 미리 양쪽에서의 출입국 심사가 끝나도록 하여 이동을 대폭 간소화한다는 구상이다. 여기에 주거와 산업 공간 역시 함께 확충한다. 이미 로렌스 웡 총리와 안와르 말레이시아 총리가 최근 만나 이런 구상을 실질화하기 위한 논의를 한 바 있다. 싱가포르가 맞이한 복합위기의 활로를 초경계 협력에서 찾겠다는 계획이다.
로렌스 웡 총리는 부총리 시절부터 다양한 종족과 문화, 종교적 다양성이 특징이자 갈등의 원인인 싱가포르의 내부 통합성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재정부 장관이면서 부총리였던 그가 이런 부분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히 그것이 경제에도 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맥락에서 그는 이번 연설에서 싱가포르 정신에 대해 규정하고 설명하는데, 먼저 싱가포르 정신을 공동체 구성원을 하나로 묶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으로 규정한다. 이는 건국 원로 세대(파이오니어, 므르데카)의 헌신에서 시작되었고, 오늘의 싱가포르 세대가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이제 막 출범한 파운더스 메모리얼 (Founders’ Memorial)의 'Project Citizens' 사례를 들며, 1966년 첫 분홍색 주민증(NRIC)을 발급받은 100만 명의 경험을 기록하는 작업을 소개한다.
또한 총리는 세대 간 체험의 차이를 짚는데, 건국 초기의 궁핍 및 폭동을 직접 겪지 않은 젊은 세대에겐 그 기억이 점점 멀어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젊은 세대가 아무 위기를 겪지 않은 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웡 총리는 코로나19를 우리 세대의 위기로 규정하며, 그때 싱가포르인들이 서로를 살피고 연대했기 때문에 위기를 넘겼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중요한 건 그 연대의 정신을 위기 때만 소환하지 말고 평시에도 생활화하여 기본값으로 삼자는 제안이다.
이 정신을 국민서약의 첫 문장으로 풀어낸다. "We the Citizens of Singapore." 여기에서 'I'나 'me'가 아니라 'we'가 먼저 오는 이유는 싱가포르의 경우 'We-First' 사회가 아니면 국가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각자만 생각하면 사회는 해체되고, 결국 개인도 무너지기에 싱가포르 정신을 단단히 하려면, 이 'We-First' 윤리를 구체적 행동으로 보여주는 시민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곧 지금까지 싱가포르가 성장해 온 배경이고, 힘일 뿐 아니라 미래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정치인이자 행정가의 언어이기에 다 신뢰할 수는 없고, 싱가포르인들이 자발적으로 집단을 생각했기보다는 권위주의적 정치구조와 보이지 않는 사회 구조적 억압이 집단을 만든 힘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로렌스 웡 총리의 싱가포르 정신 강조는 과거야 어쨌든, 최소한 앞으로는 AI 시대에서 정보 통제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될 것이 분명하고, 싱가포르인들 개개인의 요구 역시 다양해져 갈 것 역시 분명하기에 자유 및 자발적 공동체성 발현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고 느꼈다.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내실을 키워 자생력을 높임으로써 생존을 도모하겠다는 독립의 의지가 느껴지는 연설이었다. 지금 국제사회의 상황이 기댈 수 없도록 만드는 측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영토는 물론이고 자원 역시 보잘 것 없는 도시국가인 싱가포르는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아마 웡 총리의 이번 연설의 핵심은 싱가포르가 향후 나아가야 할 길은 내실을 탄탄히 한 기반 위에 외부 상황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한국에 직접 적용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은 것은 분명하지만, 위기의식의 결은 비슷하기에 우리가 참고할 만한 부분은 많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웡 총리가 지난 4월 16일 라자라트남 강연에서 한 발언의 일부를 공유한다. 어려운 시기에 총리를 맡아 향후 최소 10년 이상 싱가포르의 미래를 책임질 인물인데, 지금까지 외부적으로는 평가가 그리 나쁘지 않다.
"다른 나라들이 안으로 움츠러들더라도, 우리는 계속 열려 있어야 합니다. 아이디어에 열려 있고, 파트너십에 열려 있으며, 기회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싱가포르가 걸어온 방식이며, 우리는 결코 움츠러들지 않고, 장벽을 세우기보다, 다리를 놓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 세계의 계절풍은 다시 거세게 불고 있지만, 우리는 움츠러들 이유가 없습니다.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전 세계의 흐름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항로는 우리가 정할 수 있습니다. 용기와 선견지명, 역량으로 우리의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싱가포르는 계속해서 안전한 항구, 글로벌 교역의 중심지(emporium), 신뢰받는 허브의 역할을 수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을 통해, 우리 국민은 건강한 삶, 가치 있는 일자리, 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 역량을 지속해서 창출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맙시다. 하나된 국민으로서 다가올 폭풍을 함께 이겨냅시다. 취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는 정신, 이 나라를 일으켜 세운 정신을 지켜 나갑시다. 그리고 이 작은 빨간 점, 싱가포르가 세계 무대에서 희망, 안정, 목적의 등대로 계속 빛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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