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여행서 경찰 조서 쓴 사연…눈 뜨고 'ATM 사기' 당하다

최종일의 [세상곰파기]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운행하는 페리호. 뒤로 이스탄불의 모스크가 보인다. ⓒ 최종일 기자=News1

(서울=뉴스1) 최종일 기자 = 터키 국민들은 이방인들에게 대체로 친절했다. 지난달 다녀온 배낭여행 때였다. 이스탄불에 도착한 첫 날, 지상철 트램바이를 거꾸로 타 난감해할 때 한 현지인은 영어를 못한다면서 다음 역에서 자신이 직접 내려서 반대 노선을 타도록 도와줬다. 길을 물으면 그 방향으로 걸어가 주는 친절함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관광지 카파도키아에서 일일 투어를 돌 때 함께 식사를 했던 외국인들은 모두 친절함에 엄지를 추켜세웠다. 신혼여행으로 터키를 찾은 브루나이인은 "여러 곳을 가봤는데 터키인들의 친철함은 레벨이 다르다"고 말했을 정도다. 3주간 휴가를 받아 왔다는 미국인은 처음 만난 터키인의 가정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했다고 자랑했다.

동서양의 문화가 아우러져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터키는, '내가 좀더 정신을 차리고 다녔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며칠 간 머릿속에 뱅뱅 돌게 하는 그 일만 아니었으면 보다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지난해 인도네시아에서 원숭이가 안경을 뺏아가 한참을 멍하게 있었던 일은 정신적 충격 정도에서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신용카드를 빼앗기고, 일주일 여행 총 예산보다 많은 돈이 인출되고, 하루 하루가 소중한 여행지에서 경찰서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일에 무탈하게 배낭여행깨나 다녔봤다는 나의 자존심은 허물어졌다. 그래서 돌발 사건이 터지는 것이 여행이고 그것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으며, 그러면서 하나 더 배우게 된다는 점을 여행내내 곱씹으며 위안을 찾아야 했다.

◇ATM 현금 인출을 도운 남자

그 일은 도착 이튿날인 일요일에 벌어졌다. 숙소가 있던 이스탄불 술탄 아흐메트 지구에 있는 현지 여행사를 찾아 카파도키아와 파묵칼레를 다녀오는 여행 일정을 문의했다. 4박 5일 일정으로 3박은 야간 버스에서 하는 강행군을 선택했고 경비를 지불하기 위해 인근 ATM을 찾았다. 한 무리가 돈을 인출하고 있었고 중년으로 보이는 남성 한 명이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단신에 수염을 기른 이 남성은 외국인인 나에게 순서를 양보했다.

지난 3월말 이스탄불에 있는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앞으로 시민들이 지나다니고 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블루 모스크라고도 불린다. ⓒ 최종일 기자=News1

ATM에 다가 갔을 때에 모니터에는 터키어가 가득했다. 카드를 들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때에 뒤에 있던 남성이 다가와 "돕겠다"며 카드를 가로채더니 기계에 넣으려고 했다. 터키어가 가득한 화면 가운데 네모 몇 개가 나타났다. 남성은 "비밀번호를 넣어라"고 했다. 손가락을 가리며 번호를 누르자 화면에서 놀랍게도 별표(*)가 아니라 숫자가 그대로 나타났다. '터키는 희안하다'면서도 하나씩 꾹꾹 눌렀다.

기계는 반응이 없었다. 날 돕던 옆 사람은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카드는 기계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취소 버튼을 눌러도 카드는 나오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수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상황을 복기했다. 카드를 만진 건 날 돕던 그 남자밖에 없고 그 남자는 비번을 봤을 것이며, 애시당초 카드를 기계에 넣지 않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픈 예감이 틀리길 바랐다. 허둥지둥 인근 여행사로 발길을 돌렸다. 직원들에게 상황을 간략히 설명한 뒤 태블릿으로 카드사에 전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삐~' 하는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몇번을 시도하다 포기하고 직원에게 전화기를 부탁했다. 이번에는 상대편 소리가 너무나 작게 들렸다. 다른 직원 하나가 다른 전화기를 건넸다. 이번에는 성공했다. 카드 사용을 중지시킨 뒤에 사용 여부를 물었다. 이미 상황은 종료된 뒤였다. 4차례에 걸쳐 돈이 빠져나갔다.

스스로에게 화가 치밀어 올라서 그 '나쁜 놈'을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불탔다. 10여분 떨어져 있는 술탄 아흐메트 지구의 파출소까지 찾아갔다. 대동했던 여행사 직원은 파출소 앞에서 돌아갔다. 혼자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아뿔사' ATM 위치를 지도 위에서 찾아낼 수조차 없었다. 경찰은 이 파출소는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이라며, ATM이 있는 곳을 관할하는 "로컬" 경찰서를 찾아가야 한다며 몇 곳을 알려줬다.

터키 이스탄불 경찰에서 작성한 조서 ⓒ 최종일 기자=News1

◇터키 경찰차를 타다

여행사로 다시 와 ATM 위치를 터키어로 적어달라고 요청한 뒤 이를 들고 인근 경찰서로 갔다. 블루 모스크를 뒤로 하고 20여분 걸어갔다. 하지만 헛걸음이었다. 관할이 아니라면서 다른 곳을 알려줬다. 택시를 타고 다른 경찰서에 도착했더니 이번에는 언어가 걸림돌이 됐다. 내 영어도 짧지만 이들은 너무나 짧았다. 일요일에 출근했던 경찰 7~8명은 나를 둘러쌌고 얘기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타보지 못했던 순찰차를 타고 현장으로 향했다.

현장에서 경찰들은 ATM를 둘러보더니 남성의 인상 착의에 대해 여러가지를 물었다. 물론, 인근의 여행사로 들어가 영어가 가능한 여행사 사장이 통역을 했다. 한 경찰은 조금한 스마트폰으로 수십명의 전과자 사진을 보여줬다. "아니다"는 말만 반복해야 했다. 범인이 "터키 사람으로 보였느냐"는 질문도 했다. '당신은 한국,중국,일본인을 구분할 수 있냐'는 답을 속으로 삼키며 미소만 지었다.

경찰은 내 돈이 빠져나간 ATM의 위치와 은행을 알아야 수사가 가능하다며 한국의 카드사에서 자료를 받아서 월요일인 다음날 경찰서로 찾아오라고 했다. 일요일 밤에 버스에 오르려던 계획은 하루 뒤로 미뤄졌다.

한국의 카드사와 수차례 전화 뒤에 어렵게 사용 내역을 받을 수 있었다. 월요일 오전에 인출한 서류를 들고 경찰서를 찾았다. 다시 '아뿔사'를 외쳤다. 전날 만났던 경찰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했다. 말이 통하지 않자 이 경찰은 누군가를 불러냈다. 다행이었다.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는 젊은 경찰이 통역을 맡아줬다.

터키의 유명 관광지 카파도키아의 풍경 ⓒ 최종일 기자=News1

경찰서에 도착해서 2시간만에 조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여행 일정을 마치고 경찰에서 다시 들르겠다고 했다. 조서 복사본을 들고 숙소에 돌아오니 하루 반이 지나갔다. 여행은 좋았다. 활력을 다시 찾고 금요일 낮에 이스탄불에 복귀해서 경찰서를 찾아갔다. 영어가 무척 짧은 경찰이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난감할 수 있었지만 내손에는 조서가 있었다.

조서를 한참이나 보던 이 경찰은 조서를 작성한 두 명의 경찰은 밤 근무라고 그때에 들르라고 했다. 시간이 여의치 않았기에 현재 수사 상황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었다. 영어 번역기가 떠올랐다.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왔다"를 영어로 기입한 뒤에 이를 터키어로 바꿔서 보여줬다. 어느 순간 여러 명의 경찰이 모여들었고 한 경찰은 스마트폰을 들어서 나에게 뭔가를 보여줬다. 화면에는 "수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글이 영어로 적혀 있었다.

다시 찾아간 여행사 트레블 바자르에는 직원과 함께 사장도 자리에 있었다. 내 얘기를 전해들은 세놀 사리호루는 적잖은 시간을 할애해 조언을 해줬다. 이번 일을 계기로 어느 곳에 가더라도 비번은 절대 노출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또 경찰이 범인을 잡는다고 해도 돈을 되돌려 받는 것은 별개의 일이라며 잊어버리라고 했다. 시리아 등 인근 중동 국가들에서 범죄자들이 유입돼 터키에서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사례가 많다는 것도 알려줬다.

서울로 돌아와 일상에 다시 파묻혔을 때에 터키 경찰에서 연락이 와 범인이 잡혔고 돈은 절차를 밟아 되찾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고 쓰고 싶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그런 기대도 접은 지 오래다. 어리석은 내 실수를 다른 사람은 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래도 터키인은 여전히 아름답고 터키 여행? 여전히 '강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