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문 열었더니 불이"…구룡마을 주민들 "다 만신창이" 울상

탄 냄새·검은 연기 기둥 계속…"통장, 신분증도 집에 두고 나와"
"여긴 한집에서 불 나면 다 불 나"…반복되는 화재에 '발동동'

16일 오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발생한 화재로 불길이 치솟고 있다. 2026.1.16/뉴스1 ⓒ News1 김진환 기자

(서울=뉴스1) 신윤하 권진영 기자 = "새벽에 집사람이 막 나를 깨우면서 밖이 훤하다 해서 문을 열었는데, 바로 앞 창문에 불이 보였어. 전화기만 갖고 나왔지."

16일 오전 화재가 발생한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만난 박순식 씨(남·81)는 "모자랑 바지도 없어서 지금 입은 옷도 다른 사람한테 얻어 입은 것"이라며 "통장, 신분증도 다 집에 놔두고 못 가지고 나왔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오전 11시쯤 찾은 개포동 구룡마을은 쉽사리 검은 연기 기둥이 잦아들지 않았다. 구룡마을에서 3㎞ 떨어진 곳에서도 탄 냄새가 진동하고, 집에 연기가 스며들 정도로 화마의 영향이 확산하고 있었다.

소방은 오전에 짙게 낀 안개와 함께 솟구치는 연기 때문에 쉽게 구룡마을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는 도로 폭도 좁고 집이 빽빽하게 붙어있어 화재 진압이 어려운 것으로 전해졌다.

인근 다리 위로 대피한 주민들은 망연자실한 채 치솟아 오르는 검은 연기 기둥을 지켜보며 "다 만신창이"라고 호소했다. 이곳에서 화재를 처음 겪은 게 아닌 주민들은 소방당국이 적극적으로 불길을 잡지 않는다고 푸념했다.

구룡마을에서 25년을 거주한 70대 박 모 씨는 "우리 집도 2023년 1월 20일에 불이 났었다"며 "여기는 다 연탄을 때고, 전기도 옛날 전기라 누전이 심한 데다가 집들이 다 붙어있어서 한 집에서 불나면 다 불이 나는 것"이라고 했다.

박 씨는 "우리가 강남소방서장을 잡고 얘기해도 '지금 열심히 하고 있잖냐'라고만 말한다"며 "소방서는 산불만 안 나면 된다는 식"이라고 주장했다.

16일 오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불이 나 소방대원들이 진화작업을 벌이고 있다. ⓒ News1 김진환 기자

주민들은 며칠 전에 구청에서 화재 예방 활동을 나왔음에도 결국 불이 났다고도 호소했다.

박순식 씨는 "며칠 전에 구청에서 차에다 긴 고무호스를 싣고 와선, 불나면 빨리 안 타고 지연시켜 주는 약을 벽지 같은 데에다가 뿌렸다"고 했다. 한 주민은 화재지연제에 대해 "그건 소용이 없다"며 "지금 4지구의 반이 다 타버리고 6지구도 다 타지 않았느냐"고 지적했다.

주민들은 화재 직후 급박했던 새벽의 대피상황을 전했다. 나이가 많은 중장년이 구룡마을에 살고 있는 만큼 새벽에 불이 나자마자 소방대원들이 주민들을 업어서 대피시키고, 불 난 것도 모른 채 얼떨결에 대피하느라 옷도 못 챙겼단 이들이 많았다.

구룡마을에서 40년간 산 여성 주민은 "내가 불길을 본 게 오전 4시 10분쯤이고, 5시보다 한참 전에 났다"며 "남편이 불났다 그래서 같이 나왔는데 전기 누전은 아니고 연탄불 같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의 마지막 판자촌'인 구룡마을 일대의 건물은 화재에 취약한 나무판과 컨테이너로 지어져 있고, 천과 부직포 재질로 덮여 있었다. 전봇대의 전깃줄도 지상 1.5m 정도 높이로 낮게 거미줄처럼 처져 있는 모습이었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불길은 이날 오전 5시쯤 강남구 양재대로 구룡마을 4지구에서 시작됐다. 총 32가구가 속한 4지구는 가건물이 밀집해 있다. 소방은 신고 오전 5시 10분쯤 대응 1단계를 발령했지만 불이 산으로 확산하면서 오전 8시 49분쯤 대응 2단계로 격상했다. 이후 화재 발생 6시간 30분 만에 초진에 성공, 대응 1단계로 하향했다.

현재까지 인명피해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지만 불이 쉽사리 잡히지 않으면서 재산 피해는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16일 오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발생한 화재로 경찰이 마을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있다. ⓒ News1 김진환 기자

sinjenny97@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