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론, 그럼에도 권영국 택한 사람들…"나를 살리는 표였다"
"여성·성소수자·장애인 없는 양당정치…나 대변하는 5번에 투표"
"이준석 이기길 바랐다"…전문가, 권영국 완주에 '진보 정치 활력' 평가
- 신윤하 기자
(서울=뉴스1) 신윤하 기자 = 낙선한 후보한테 간 표가 곧 '죽은 표'라는 사표(死票)론은 매 선거마다 유권자들을 고뇌하게 한다. 특히 2022년 제20대 대선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패배하자 진보진영 내에서 사표론은 더욱 대두됐다. 2.73%를 득표한 심상정 당시 정의당 후보에게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에선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표론 속에서도 소수 정당 후보에 한 표를 행사하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권영국 전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0.98%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특히 KBS·MBC·SBS 등 지상파 방송 3사 출구조사에 따르면 20대 여성 유권자는 5.9%가 권 후보에 투표할 정도로 투표세가 두드러졌다.
권 후보에게 투표한 시민들은 "나를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후보였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여성과 노동자, 성소수자, 장애인, 환경 등 진보 의제를 언급한 유일한 대통령 후보였다는 점을 투표 이유로 꼽았다.
서울 마포구에 거주하는 30대 여성 김민정 씨(가명)는 "권 후보의 공약이 엄청나게 와닿았다기보단, 다른 후보들의 공약이 너무 마음에 안들었다"며 "특히 소수자 인권 관련 의제의 부재가 컸다"고 말했다.
김 씨는 "윤석열 정부 내내 답답했던 지점은 모든 의제가 윤석열 정부와 민주당의 정치적 싸움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점이었다"면서 "여야의 대결이 아닌 의제들은 모두 묻히고 중요한 사안도 모두 여야의 당파 싸움으로밖에 안 보이면서 답답함을 느꼈다. 양당 정치는 안 되겠다는 심각성을 느꼈다"고 강조했다.
심상정 전 의원이 정계를 은퇴한 후 침체기를 겪고 있던 진보 정치가 다시 본궤도에 오르길 바라며 한표를 행사했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거대 양당 중심의 정치에 대한 피로감과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이 권 후보를 택했다.
서울 성북구에 사는 이 모 씨(29·여)는 "거대 양당 체제가 보기 싫었고, 권력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제3당이 다시 생겼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며 "그런데 그 제3당이 여성을 모욕하는 이준석 후보의 개혁신당이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고, 노동자로서 노동자의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권 후보에 투표했다"고 설명했다.
민주노동당이 당명을 바꾸기 전부터 정의당을 지지해 왔다고 밝힌 박 모 씨(33·남)는 "지난 2번의 총선을 거치면서 원내 군소 진보 정당들은 민주당의 위성정당을 통한 기생 형식의 생존을 선택했다"며 "원외더라도 민주당과 구별되는 진보 정당이 일정한 위상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 씨는 "권 후보의 캐치프레이즈가 '불평등 해소'였는데, 민주당이 전략적 우클릭을 남발하는 중에도 그걸 공약으로 명시했다는 점이 좋았다"며 "지난 정부에서 박살 내다시피 했던 여성 공약들도 무게감 있게 다뤄졌다는 점이 의미가 있다고 느꼈다. 이재명 대통령도 성평등부 신설 등 여성 공약을 내걸었지만, 문재인 정부 당시 간신히 제도권 논의에 진입했던 비동의 강간죄, 낙태죄 폐지 대체 입법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선 침묵했다"고 지적했다.
TV토론에서 여성 신체에 대한 성폭력적 발언을 한 이준석 전 개혁신당 후보에 대한 반발감도 권영국 후보에 대한 투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김 씨는 "권영국이 제발 이준석을 이길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며 "그런데 압도적으로 져버렸다. 진보 야당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이었으면 좋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서울 영등포구에 거주하는 유 모 씨(29·여)는 "이번엔 이재명 후보가 확실히 당선될 것 같았고, 이준석으로 3자 구도가 되는 게 너무 보기 싫어서 '5번'에도 표가 좀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들 유권자들은 자신의 표가 정권 탄생 등에 반영이 안 될 것이라는 '사표'에 대한 우려는 없었냐는 질문엔 고개를 저었다.
거대 양당이 대변하지 않은 유권자들의 존재가 권 후보의 득표율로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이 씨는 "사표가 될 것을 예상하고 찍어서 딱히 우려하진 않았다"며 "어차피 탄핵 이후 대통령 선거이다 보니 이재명 대통령이 당선될 것 같았고, 권 후보의 득표율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 유권자인 30대 남성 진 모 씨는 "설사 내란을 일으킨 정권이 연장되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권 후보에 던진 표가 사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권 후보가 유의미하게 득표한다면 원내 진보 진영의 거의 유일한 스피커가 된 민주당에 대한 의사 표시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진 씨는 "가령 이번에 20대 여성층에서 권 후보 득표율이 5% 이상이라고 들었는데 이런 표심이 지속해서 확장한다면 민주당이 여성 의제에 침묵하는 일에 제동이 걸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밝혔다.
뉴스1이 만난 유권자들은 3년 전 지방선거에서 정의당이 광역의원 비례대표 득표율 4.14%를 기록해 민주노동당이 이번 대선에서 TV토론 참가 자격을 얻었다는 점을 언급하며 "죽은 표라는 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직선거법은 직전 전국 단위 선거 득표율 3% 이상 득표한 정당 후보에게 TV토론 참가 자격을 부여한다.
지난 대선에선 민주당에 투표했지만 이번엔 권 후보를 투표했다는 공 모 씨(31·여)는 "선거 결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못 미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를 정말 대변할 수 있는 후보가 말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는 것도 정치적 행위라 생각한다"며 "TV토론과 공약을 통해 나의 정체성이기도 한 여성·성소수자·노동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권 후보를 보며 더할 나위 없이 정치 효능감을 느꼈다. 사표가 아니라 나를 살리는 표였다"고 했다.
전문가는 1% 미만의 득표율이긴 했지만 권 후보의 대선 완주가 진보 정치와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유권자들에 효능감과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지난 3일 선거가 끝나자마자 권 후보에게는 밤새 13억원의 후원금이 쏟아졌다. 입금자명엔 '20대 여성' '30대 성소수자' '50대 건설노동자' '40대 성폭력 생존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정체성이 적힌 것으로 전해졌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권 후보가 이번 대선 TV토론을 기대보다 훨씬 잘했고, 진보 정당이 왜 필요한지를 정말 잘 보여줬다"며 "4등이던 권 후보에게 주는 표가 '사표 중의 사표'인데도 투표한 유권자들은 우리 사회의 여성,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얘기하는 사람에게 한 표를 더 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 평론가는 "'내 표가 사표가 돼도 좋으니 이런 진보 정당은 우리가 키워야 한다' 생각한 유권자들이 있었던 것이고, 또한 이번 대선에서 표를 주지 않더라도 후원금을 통해 돈이라도 전달하겠단 사람들이 생각보다도 많았던 것"이라며 "이번 대선에서 권 후보와 민주노동당은 아주 선전했다. 진보 의제를 가지고 앞으로 1년간 싸워 나가면 내년 지방선거에선 한두군데 정도는 당선자들이 당선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sinjenny97@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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