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 부당함으로 불이행
- 박동해 기자

(서울=뉴스1) 박동해 기자 = 지난 21대 대선 직후인 6월 4일, 신임 경찰관을 교육하는 중앙경찰학교 교정에선 '경찰 역사 골든벨' 행사가 열렸다. 치열한 경쟁 속에 최후의 2인이 남았을 때 최후의 1인을 가릴 마지막 문제가 출제됐다.
"2018년 경찰영웅으로 선정된 문형순 서장은 1950년 군의 예비 검속자 처형 지시를 거부하고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이때 문 서장은 군의 처형 지시 공문에 직접 자필로 거부의 뜻을 써서 보냈는데 이때 적은 문구는 무엇인가?"
여덟 글자로 된 정답은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다. 문형순 전 제주 성산포경찰서장은 한국전쟁 발발로 계엄이 발령된 엄혹한 상황에서도 군 당국의 학살 명령을 단호히 거부했다. 경찰은 이런 공적을 기려 그를 2018년 '경찰영웅'으로 선정했다.
경찰학교의 경찰 역사 골든벨 영상은 최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본관 1층 로비 대형 스크린에서 반복해 재생되고 있다. 정답을 적은 종이를 손에 들고 환호하는 최후의 1인, 그 신입 경찰관의 표정이 매일 본청을 오가는 경찰 지휘부의 시선과 마주한다.
위법·부당한 비상계엄에 연루돼 경찰 지휘부가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는 현재 시점에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란 정답 문구를 들고 환호하는 경찰교육생의 모습이 다소 아이러니하다.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선포 직후 열린 경찰청 긴급 간부회의에서 국회 출입을 통제하라는 위법한 지시에 반대 의견을 낸 경찰 간부는 한 명도 없었다. 명령에 죽고 산다는 군에서도 계엄 당시에 부당한 지시를 거부한 지휘관들은 나왔다.
오는 10월 21일이면 경찰 창설 80주년을 맞는다. 그간 경찰은 부당한 권력자의 지시를 부단히 이행하며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해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경찰은 끊임없이 과거와의 단절을 약속했지만 21세기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지난해 위헌적인 비상계엄 과정에서 경찰은 국회 출입을 통제한 바 있고 당시 행위는 위헌·위법했다…경찰은 앞으로 어떠한 경우라도 위헌·위법한 행위에 절대 협조하거나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6월 경찰청장 직무대행을 맡게 된 유재성 경찰청 차장의 말이다. 그의 말이 정권 교체에 따른 눈치보기성 발언일지 진심인지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시 경찰청 본청 로비, 골든벨 영상이 반복되는 스크린 옆에는 경찰 스스로 '대한민국 1호 민주경찰'이라 명명한 백범 김구 선생의 흉상이 서 있다. 또 "어떠한 불의나 불법과도 타협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경찰헌장도 붙어 있다.
'민주경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 등 경찰청 로비에 경찰 스스로 걸어둔 이런 다짐들이 9층 경찰청장실에서도 유효할지 국민들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potgu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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