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정치가 흔들릴 때 종교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윤중식 한국기독교원로의회 상임총무(전 국민일보 부국장)
윤중식 한국기독교원로의회 상임총무(전 국민일보 부국장)

윤중식 한국기독교원로의회 상임총무(전 국민일보 부국장) = 지금 한국 사회는 중대한 전환기에 놓여 있다. 겉으로는 정상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서는 사회적 양극화, 공정성의 붕괴, 도덕적 해이 등 구조적 문제들이 깊게 침전돼 있다. 부와 권력은 소수에게 집중되고, 인사 청탁과 권력형 비리는 반복되고 있다. 사회 구성원들이 삶의 기준과 방향을 잃어가고 있는 이때, 정치는 신뢰를 잃었고 시민은 점점 냉소로 돌아서고 있다.

사회가 위기 상황일수록 종교가 제 목소리 내야

이러한 시기일수록 오래된 질서이자 근본 윤리의 전통인 '종교'가 제 목소리를 내야 할 때다. 종교는 인간의 양심을 일깨우고, 사회가 무너질 때 그 윤리적 기초를 다시 세우는 마지막 방어선이 되어왔다. 현대 민주주의 역시 종교적 자유와 도덕 원칙 위에 세워졌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종교가 먼저 자성해야 할 지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일부 종교 지도자의 물질주의, 권력과의 유착 그리고 비윤리적인 운영 행태는 신뢰를 크게 훼손했다. 종교가 사회적 개혁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먼저 자신의 도덕성과 투명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가 던지는 메시지 역시 공허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가지는 위상과 영향력은 절대 가볍지 않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사회적 위기와 혼란이 있을 때마다 그 치유와 회복의 중심에 서 있었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종교인이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희생을 감수하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했다. 이런 종교의 역사를 되새기고 종교가 다시금 시민들의 신뢰를 얻으려면 현실의 문제들을 외면하지 말고 정직하게 마주해야 한다.

서울 용산구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관계자가 전시장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정치적 개입 경계하고 내부 혁신·투명성 회복 필요

그런데도, 종교를 향한 외부의 부당한 개입에 대해서는 명확한 선을 그어야 한다. 최근 특정 종교인을 대상으로 한 특검팀의 전격적 압수수색은 사안의 중대성을 떠나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의 원칙을 위협하는 행위로 비칠 수 있다. 만일 그 수사나 행정 조치가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는 국민 전체의 신앙 자유를 훼손하는 중대한 침해가 된다.

정치권력이 종교에 개입하고자 하는 욕망이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이는 권력이 시민사회의 다양한 영역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교분리 원칙은 타협할 수 없는 기본적 가치다. 특히 특정 종교나 신앙 집단에 대한 공격이 정치적 의도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이는 사회 전체의 신뢰와 공공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

종교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비판이 정치권력의 도구로 작동하거나 특정 신앙을 위축시키려는 의도로 변질된다면 이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정권이 종교를 길들이려 할 때, 사회는 더욱 깊은 혼란과 갈등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현실의 고통에 적극 동참하며 사회적 신뢰 회복해야

종교의 역할은 단지 도덕적 선언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기후위기·빈부격차·인권침해와 같은 실질적 문제를 껴안는 데 있다. 종교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리고 실천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치유 활동, 환경 운동과 노동 인권을 위한 연대 등은 종교가 어떻게 시대의 고통과 함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귀중한 사례다.

실천적 신앙은 단지 구호나 선언에 머무르지 않고 행동으로 연결돼야 한다. 현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야말로 종교가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 교회와 사찰, 성당에서의 환경 보호 실천, 빈곤층 지원 프로그램 확대, 난민과 소수자 인권 보호를 위한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종교계 내부의 세습과 특권의식, 폐쇄적 운영 구조를 개혁하고 투명한 재정 운영과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확립해야 한다. 종교가 사회적 양심으로 다시 자리매김하려면 자신의 내부 개혁과 더불어 외부 사회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

지금은 침묵할 때가 아니다. 종교는 정치적 도구도, 도피처로 활용되어서는 더욱 안 된다. 사회의 양심으로서, 흔들리는 시대에 다시 윤리의 버팀목이 돼야 한다. 공정과 정의 그리고 인간 존엄을 지켜내는 일. 그것이 오늘 우리가 종교에 기대는 이유이며, 종교가 다시 사회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