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가져가…" 스물다섯 딸은 4명의 생명을 살리고 떠났다[21그램]①
삶의 끝, 또 다른 삶의 시작…"딸 몫까지 건강하게"
환자 4명에 새로운 삶 선물한 장기기증자 문세연씨
- 유민주 기자, 유승관 기자
(서울=뉴스1) 유민주 유승관 기자 = "다 가져가…"
지난 7월14일 스물다섯 살 문세연씨가 숨을 거두기 직전 허공을 바라보며 뱉은 마지막 말이다. 엄마 최은화씨는 그날 세연씨의 목소리가 아직 또렷하다.
딸의 연락을 받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며 은화씨는 '이건 아닌데, 이렇게는 안되는데'를 되뇌이며 불길한 예감을 애써 억눌렀다. 세연씨가 몸이 불편하다며 오빠와 함께 병원 진료실을 찾았을 때만 해도 걱정이 크진 않았다. 심지어 오빠는 집으로 돌려보내고 엄마한테도 마음 편하게 있으라며 안심시키던 딸이었다. 하지만 몇 시간 뒤 걸려온 전화 한통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 많이 아파"
"엄마 나 많이 아파. 저번처럼 아파"라는 짧은 몇 마디에 담긴 미세한 떨림이, 은화씨에겐 큰 파동으로 다가왔다. 이미 4년 전 뇌출혈로 관절에 마비가 왔던 세연씨는 당시 모야모야병을 진단받았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2년 주기로 검진을 받으며 재활도 열심히 해왔다. 누구보다 운동을 꾸준히 해오던 세연씨였다. 그는 최근 들어서 취직도 하고 창업도 꿈꾸던 기특한 딸이자 여동생이었기에 가족들도 호전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혈관이 좁아지는 병으로 알려진 모야모야병은 이름만큼이나 생소하고 예측이 불가능한 병이었다. 완치 사례가 없을뿐더러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세연씨도 예고 없이 찾아온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 세연씨는 응급실에 실려간 지 2시간여 만에 뇌사 추정자가 됐다.
'세연이가 원하는 게 이게 맞을까? 이렇게 해도 되나?'
딸과의 갑작스러운 이별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지금 당장 딸의 장기 기증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은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평소 아들과 딸에게 "혹시 내가 사고로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연명치료 안하고 장기기증을 하겠다"고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곤 했는데, 딸을 대신해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먼저 찾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은화씨는 딸이 중학교에 진학하고 대학 진학까지 약 7년간 떨어져 지냈었기에 누구보다 딸과의 일상을 소중히 한 사람이었다. 당시 가정 형편상 군산에서 할아버지 집에서 공부를 하다가 이제야 매일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딸이었다. 오빠와 엄마한테 자주 잔소리를 하던 일찍 철든 막내 세연씨는 은화씨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아픈 손가락이었다.
◇ "어머니 선택이 옳아요"
그렇게 망설이는 동안 1분1초가 잔인할 만큼 빠르게 흘러갔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어 힘들어 하던 은화씨를 정신차리게 해 준 건 다름 아닌 세연씨의 친한 친구들이 건낸 말들이었다.
"어머니 결정이라면 세연이는 무조건 따를 거예요, 고민하지 마세요.", "세연이도 그런 성격이잖아요, 그게 맞다고 말할거에요.", "어머니 선택이 옳아요, 자책하지 마세요." 은화씨 마음의 짐을 덜어준 5명의 친구들는 딸의 수십년지기 친구들이었다. 누구보다 가족들을 끔찍히 생각한 딸을 지켜봐왔기에 자신있게 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마지막 은화씨의 결정으로 문세연씨의 폐, 간, 양쪽 신장은 환자 4명에게 이식돼 새로운 삶을 선물했다. 당시를 회고하던 은화씨는 "후회 없는 선택"이라면서도 "원래 장기 다섯개를 이식할 수 있다고 했는데 제가 시간을 지체하면서 네개로 줄었다"며 잠시 고개를 떨궜다.
실제로 수혜자에게 기증되기까지 모든 과정은 신중히 이뤄진다. 뇌사 추정자 가족이 장기기증 동의를 하고 나서도 두번의 뇌사조사를 거치고, 전문의 두명 이상과 비의료인 한명 이상의 위원으로 구성된 병원 내 뇌사판정위원회를 열어 뇌사여부를 또 판정한다. 이때 만장일치로 뇌사판정에 동의하면 뇌사판정 시각이 나오고 법적 사망시각이 기록된다.
은화씨는 처음에 실감을 못하다가 요즘 들어 조금씩 딸의 빈자리를 눈으로 쫓고 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추억들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집에 홀로 있는 시간은 고통스러울 만큼 힘들어졌다. 세연씨와 연년생인 아들도 그리움과 슬픔을 티내지 않고 묵묵히 그 시간을 같이 견디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위로도 은화씨에게 와닿지 않았다.
"다들 빨리 밝아져서 고맙다고 말하니까 추스른 척을 하는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눈치보여서 마음대로 잘 울지도 못하겠더라구요. '가슴속에 묻어야 된다'는 말이 이런 뜻이구나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어요."
◇"천사 같은 아이의 삶"
슬픔에 잠겨 있는 은화씨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건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이 제공하는'기증자 가족 지원 서비스'였다. 딸이 아직 병상에 누워 있을 때부터 모든 상황을 지켜봐왔던 사회복지사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마음을 다잡았다.
은화씨는 딸과의 이별을 매일 받아들이는 중이다. 딸의 장기를 기증받은 분들에 대한 생각도 조금은 달라져가고 있었다. 아직 편지를 주고 받을 만큼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소식이 궁금해지는 날이 올 것 같다고 말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장기 이식받은 분들은 천사 같은 내 아이의 삶을 가지셨으니 참 좋으시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건강하게 오래 사시고 딸의 긍정적인 기운이 그대로 이어져서 세연이가 못 산 만큼 더 많이 사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youmj@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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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흔히 영혼의 무게를 '21그램'이라고 표현합니다. 쌀 한줌보다 가볍지만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무게입니다. 영혼이 빠져나가면서 누군가의 삶에 생명을 불어넣는 이들이 있습니다. '장기조직기증 희망자'들입니다. 삶의 끝과 시작이 교차되는 순간을, 우리는 '기적'이라 부릅니다. <뉴스1>은 이번 추석 연휴 기간 우리 삶의 기적 같은 순간을 전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