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路] 국민은 언제쯤 '정치보복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김상훈 기자

(서울=뉴스1) 김상훈 기자 = '집권 시 문재인 정부에 대한 적폐청산 수사를 하겠다'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발언이 정국을 휩쓸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여권이 '대놓고 정치보복을 하겠다는 것이냐'며 폭발했고, 이후 윤 후보가 '정치보복은 없다'며 선을 긋기는 했으나 발언 의도를 놓고 후폭풍이 거센 모습이다.
문제의 발단은 지난 9일 공개된 윤 후보의 '중앙일보' 인터뷰로, 당시 윤 후보는 '집권하면 전(前) 정권 적폐청산 수사를 할 것이냐'는 질문에 "해야죠. 해야죠. (수사가) 돼야죠"라면서 "문재인 정권에서 불법과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도 법에 따라 시스템에 따라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같은 날 청와대가 "매우 부적절하고 불쾌하다"는 공식 입장을 냈으나 여파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튿날(10일) 문 대통령이 직접 등판해 발끈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윤 후보를 향해 "(문재인 정부에서) 중앙지검장, 검찰총장 재직 때는 이 정부의 적폐를 있는데도 못 본 척 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적폐를 기획사정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것인가. 대답해야 한다"고 언급한 뒤 현 정부를 근거 없이 적폐수사의 대상·불법으로 몰았다며 강력한 분노를 표하고 사과를 요구했다.
문 대통령이 이처럼 여과 없이 분노를 표출한 때는 2018년 자신에 대한 검찰수사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정치보복'이라 거론한 이명박 전 대통령을 향해 "분노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한 이후 사실상 처음이다. 더욱이 지금은 대선이 20여 일 남은 시기로 대통령이 제1야당 후보의 발언을 문제 삼아 사과를 요구한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의 분노에 대해 "식물 대통령으로 죽은 듯이 직무정지 상태로 있어야 하나"라며 정당한 반론권을 행사한 것이라고 했다. 실제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선거 정국에서 정치 중립 위반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했고, 그렇기에 의도하지 않았을 수 있으나 결국은 관련 논란이 확산됐다는 점에선 아쉬움이 남는 대응이기도 하다.
예상대로 국민의힘은 즉각 "부당한 대선개입"이라며 지적했다. 여기에 후보들 간 미래를 위한 정책경쟁이 펼쳐져야 할 대선이 문 대통령의 등판으로 자칫 대통령과 후보 간 대결구도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아진 점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윤 후보의 책임도 묻지 않을 수 없다. 논란의 빌미를 제공한 만큼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는 뜻이다. 윤 후보는 뒤늦게 자신의 발언에 대해 '시스템에 따라 잘못된 게 있으면 원칙대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취지였다고 해명했으나 애초에 해당 발언은 정치보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에는 충분한 발언이었다 싶다. 문 대통령과 윤 후보의 '관계'를 되짚어봐도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는 윤 후보가 대선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현 정부·여당 지지자들의 마음을 얻지 못해 '반쪽짜리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 이미 이번 논란에 문 대통령까지 참전하며 여권 내 지지층 결집을 이끌어냈고, 문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운 윤 후보를 향해선 보수층 역시 결집하는 모양새다.
문 대통령도 지난 5년간 통합·화합 정치를 이루려 노력했으나 부족했다고 반성하는 마당에 '정치보복 프레임'을 꺼내들어 선거 전부터 국론 분열 단초를 제공한 게 아쉽다.
사실 한국 정치사에서 정치보복은 더 이상 어색한 프레임이 아니다. 지난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진영을 막론하고 전직 대통령을 향한 크고 작은 수사가 벌어졌고 전 정부 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이 같은 행태는 정권이 재창출(김대중 정부→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박근혜 정부)됐을 때에도 예외가 없었다.
다만 우리 국민들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극단적 선택과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의 수감을 목도하면서 '정치보복의 트라우마'를 앓고 있다. 이는 세계 정치사에서 유례없는 전직 국가원수들의 연쇄 수난사가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게 적폐청산이라는 명분 아래 이뤄졌다는 점도 드문 일이다.
잘못은 들춰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들이 퇴임 후 감옥으로 직행하는 게 코스처럼 여겨지고 이에 따라 국론 분열이 벌어지는 현실은 언제까지 이어지는 걸까. 언제까지 우리 국민은 퇴임 후 온전치 못한 대통령을 봐야만 할까.
어쩌면 우리는 최근 윤 후보에게 직언을 한 염수정 추기경의 발언에서 오랜 질문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11일 염 추기경은 윤 후보를 환담한 자리에서 "보복으로 시작하면 보복으로 끝난다. 보복이 이기는 것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직접 윤 후보의 적폐수사 발언을 언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됐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언급도 살펴볼 만하다. 김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자신을 사지로 내몰았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용서했다. 김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복권은 앞으로 더 이상의 정치보복이 없어야 한다는 내 염원을 담은 상징적 조치였다"고 했다. 누가 되든 차기 대통령이 본받을 자세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전직 대통령들 또한 자신의 행적을 돌아볼 때 꺼내봐야 할 대목들이 아닌가 싶다.
award@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