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하지 않는 국가, 그 대가는 이미 시작됐다 [이근면의 품격 몽상]

이근면 초대 인사혁신처장(사람들연구소 이사장)

편집자주 ...대한민국은 더 이상 가난한 나라는 아니지만, 성취에 걸맞은 존중과 신뢰를 충분히 누리고 있는지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아 있다. '품격 몽상'은 기업·대학·정부 현장에서 체감한 이 간극에서 출발한다. 이 시선과 시각에서 말하는 품격은 결과가 아니라 권한을 쓰는 방식, 규칙을 대하는 태도, 갈등을 조정하는 국가의 언어다. G3 국가를 지향한다는 것은 경제 규모가 아니라 세계가 신뢰할 수 있는 운영의 품격을 갖추는 일이다. '품격 몽상'은 성장 이후 대한민국이 반드시 넘어야 할 국격의 문턱을 사유하는 기록이다.

이근면 초대 인사혁신처장(사람들연구소 이사장)

6·3 지방 선거가 시작됐다. 지방정부를 최고의 자치단체로 만들겠다는 출사표가 백가쟁명이다. 선택을 위한 온갖 미려한 공약이 넘쳐난다. 아마 승패에 따라 가장 울고 웃는 곳은 떠나야 할 사람과 남는 사람이 결정되는 공무원 인사일 것이다. 정치적 중립은 구호이고 생존적 논리와 줄서기가 이미 신풍속도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거기에 각종 정권 차원의 선수 교체가 일어나면 부역자 색출의 선두 희생자 또한 공무원이다.

누가 옳고 그른지, 미래가 어떻게 될지보다 과거의 사례에서 학습되고 순치됐다. 하긴 수학여행조차 사고 나면 인솔 교사에게 책임이 돌아가 전국적으로 수학여행 자체가 급감했다니 가히 행정선진화(?)와 보신화(?)가 일상화됐음을 방증키도 한다.

결국 행정이 멈추거나 지연되거나 회피하게 된 그 모든 결과는 국민 모두의 부담과 손실로 귀착된다. 그래도 나는 멋지게 하시겠다는 지자체장, 입후보자들을 선택하실 때 행정을 바라보는 눈이 보스인가, 지역 민초인가를 가늠해야 최소한의 '나의 권리'를 지킬 수 있게 된다.

대전시선관위 직원들이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사전투표 제1차 모의시험에서 투표용지를 보이고 있다. ⓒ 뉴스1 김기태 기자
적극행정은 사라지고 소극행정이 지배하는 나라

정치는 시끄러울 수 있다. 갈등이 민주주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전제가 있다. 행정은 흔들리지 않고 작동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그 전제가 무너지고 있다. 정치가 싸우는 사이 행정이 결정을 미루고 있다. 정책은 발표되지만 실행은 지연되고, 책임은 말하지만 판단은 사라진다. 국가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서 있다. 행정의 본질은 판단과 실행이다. 그러나 현실의 행정은 점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적극행정은 사라지고, 소극행정이 시스템이 되어가고 있다.

공무원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구조다. 지금의 행정 시스템은 명확하다. 결정하면 책임은 개인이 지고, 결정하지 않으면 책임은 사라진다. 이 구조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무엇인가.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즉 소극행정이다. 그래서 현장에서 반복되는 장면은 익숙하다.

"전례가 없다." "법적 근거가 불명확하다."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 이 문장들은 신중함이 아니라 사실상 결정 회피의 언어다.

신산업 인허가는 수년씩 지연된다. 플랫폼, 모빌리티, 핀테크, 의료 분야에서 기업은 규제를 피해 해외로 나간다. 규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하지 않는 국가를 떠나는 것이다.

재난과 안전에서도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사전에 위험 신호가 있었음에도 "권한이 없다", "책임 소재가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아무도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사건이 터진 뒤에는 대책이 쏟아지지만, 그 이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소극행정이 합리적 선택이 된 구조의 결과다. 우리는 적극행정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현실은 적극적으로 판단한 공무원은 사후 감사와 수사의 대상이 되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개인 책임으로 귀결된다. 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경우에는 책임을 묻기 어렵다.

이 구조에서 적극행정은 용기가 아니라 위험한 선택이 된다.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 행정은 적극행정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소극행정을 유도하는 이중 구조에 갇혀 있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국가는 점점 느려진다. 결정은 늦어지고, 기회는 사라진다. 기업은 투자하지 않고, 혁신은 밖으로 빠져나간다. 국민은 행정을 신뢰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세계는 이렇게 평가한다. "능력은 있지만, 믿을 수 있는 나라는 아니다."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이 마주한 현실이다.

적극행정은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소극행정은 방치해서는 안 된다. 소극행정은 단순한 업무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 기능을 마비시키는 행위다. 결정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결정이다. 그리고 그 결정은 국민에게 비용을 전가한다. 따라서 소극행정에 대해서는 국민의 이름으로 정리해야 한다.

이 말은 공무원을 처벌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공무원이 적극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정에 대해서는 명확한 책임을 묻는 구조로 바꾸자는 것이다. 그래야 균형이 맞는다.

인사혁신처 '적극행정 온' 홈페이지 캡처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첫째, 적극행정 보호 원칙을 제도화해야 한다. 합리적 절차와 전문가 판단에 기반한 정책 결정에 대해서는 사후 결과와 분리된 평가를 해야 한다. 실패를 처벌하는 구조에서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둘째, 동시에 소극행정에 대한 명확한 기준과 제재를 도입해야 한다. 정당한 사유 없이 결정을 지연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조직 차원의 평가와 책임이 따라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 책임 구조를 개인 중심에서 시스템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집중시키는 대신 의사결정 과정은 철저히 기록하고 공개해야 한다. 책임은 숨기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것이다.

넷째, 전문성 중심 행정으로 전환해야 한다. 순환보직 중심 구조에서는 복잡한 정책을 깊이 있게 다룰 수 없다. 핵심 분야에서는 장기 전문성을 축적해야 한다.

다섯째, 규제 철학을 바꿔야 한다. '금지 후 허용'이 아니라 '허용 후 관리'다. 규칙은 명확해야 하고,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시장은 자유보다 안정성을 더 중시한다. 이 5가지는 새로운 개혁이 아니다. 국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익과 부패는 철저히 응징하는 시스템이 아울러 구축돼야 한다. 선출직 지자체장의 상당수가 법적 책임으로 의율됐지만 그 실태는 그 후로 바뀐 것이 없다. 국민의 봉사자이고 리더라는 분의 자기 관리 수준 또한 행정의 수준으로 수렴된다.

행정은 국가의 속도를 결정한다. 정치가 방향을 정한다면, 행정은 그 방향을 현실로 만든다. 지금 대한민국의 문제는 방향이 없는 것이 아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엔진이 멈춘 상태에서 어떤 전략도, 어떤 비전도 의미가 없다.

세계는 묻는다. 이 나라는 결정을 할 수 있고 위기에서 움직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순간, 대한민국의 경쟁력은 조용히 무너진다.

정치의 품격이 방향을 만든다면, 행정의 품격은 그 방향을 실행한다. 그리고 행정의 품격은 결국 적극행정을 보호하고, 소극행정을 바로잡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열쇠는 국민의 선택에서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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