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열사릉과 조선혁명박물관[정창현의 북한읽기]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조국해방절'(광복절) 하루 전인 14일 평양 대성산에 있는 혁명열사릉을 찾아 항일열사들을 추모했다. 올해는 당·정·군의 고위간부들뿐만 아니라 부인과 딸 김주애도 대동했다. 남쪽에서는 1949년부터 공식적으로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고 호칭하며 기념하고 있지만 북쪽에서는 '조국해방절'이라 부른다.
이곳에는 김일성 주석과 함께 청년운동에 참가했던 인물들과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주요 간부 140여 명이 묻혀 있다. 한국으로 치면 일제 강점기 애국지사와 임시정부 요인이 묻혀 있는 국립현충원의 '독립유공자 묘'에 해당한다. 이외에 다른 항일열사들은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과 각 지방 대도시에 조성된 혁명열사묘역에 묻혀 있다.
같은 날 박태성 내각총리, 조용원 당 조직비서 등 고위간부들은 만수대언덕에 있는 조선혁명박물관도 참관했다. 이곳은 1920년대부터 현재까지 일제강점기 항일투쟁부터 사회주의 건설사가 집대성된 박물관으로, 전시실만 100개가 넘는다. 1년에 200만 명 이상의 청년학생, 당원, 근로자, 군인 등이 혁명전통 교양을 받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전문 연구인력 외에도 참관자를 위한 전문 해설강사만 50명 넘게 배치돼 있다. 한국으로 치면 독립기념관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합쳐 놓은 것과 비슷하다.
북한은 조선혁명박물관을 '혁명전통교양의 대전당'이라고 평가하며 "박물관에 보존 전시된 모든 사적물과 자료들은 대대손손 길이 전해가야 할 가장 귀중한 재보"라고 선전한다. 이곳에서는 중국과 일본, 국내에서 수집된 원본자료들이 소장, 전시된다. 북한 각지에는 조선혁명박물관의 분원(分院)에 해당하는 양강도 혜산시의 보천보혁명박물관 등을 비롯해 이른바 '항일전적지'마다 사적관이 조성돼 있다. 이러한 혁명박물관, 혁명사적관 등에 배치돼 있는 인원만 6000여 명이 넘는다.
북한은 항일투쟁을 연구, 선전, 교양하는 인력도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비롯해 김형직사범대학, 김철주사범대학, 각 도 사범대학에 설치된 역사학부와 혁명역사학부에서 연구와 사적 전문 인력을 배출하고 있다. 대학과 박사원(대학원) 졸업 후 연구인력은 김일종합대학 혁명역사연구실,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와 혁명역사연구소, 조선혁명박물관 등에 진출해 혁명역사를 연구하며, 일부는 각 대학의 교수로 임용된다. 평양과 각 도 사범대학 혁명역사학부 출신들은 각지에 설치된 혁명사적관에 배치돼 간부와 해설강사로 활동한다.
1980년대 초 '조선전사' 항일무장투쟁사편이 4권이 출간되고, 1990년대에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출간 이후 북한의 항일무장투쟁 연구는 정체됐다. 여전히 조선노동당 이론지 '근로자'를 비롯해 '력사과학' 등 학술지에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는 글들이 실리기는 하지만, 천편일률적으로 거의 비슷한 내용이 반복될 뿐이다.
심지어 2018년 연변대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의 연구사들은 자신들의 연구 성과가 아닌 '세기와 더불어'의 내용을 요약하는 수준에서 발표했다. 일제강점기 생산된 일본 자료, 중국공산당 자료 원문을 봤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혁명전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정치적 수사(修辭)는 여전하지만 2세대 연구자들이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연구역량의 질적 저하가 두드러지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최상순 조선사회과학자협회 부위원장, 송동원 사회과학원 혁명역사연구소장, 정치건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장 등 북한을 대표하는 2세대 혁명역사연구자들은 남쪽을 방문하고 국제학술회의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제는 모두 은퇴했다.
그래도 북한에서는 학교에서 항일투쟁의 역사가 별도 교과목으로 교육되고, 연구자의 양성과 사회 진출이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북한의 '혁명역사학계'와 조선혁명박물관에 비견되는 우리의 독립운동사 연구와 독립기념관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재명 대통령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통해 "국민과 함께 새로운 광복의 역사를 써 내려가겠습니다"라며 거창한 비전을 내놓았다. 이 대통령은 "순국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제대로 기릴 수 있도록, 생존 애국지사와 독립유공자들을 더 각별하게 예우하고, 미서훈 독립운동가에 대한 발굴과 포상을 더욱 확대해 나가고, 독립운동의 가치가 우리의 일상에 더 깊이 뿌리 내리도록 국내외 독립운동 기념 시설을 적극 조성하고, 자랑스러운 역사의 발자취를 반드시 미래세대에 더 널리 전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잘못된 역사의 유산을 바로잡고,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의 명예와 삶을 지켜내는 일에 국가가 가진 온 역량을 투여하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공허한 메아리로 들린다. 과거 삼일절이나 광복절마다 내놓은 전임 대통령의 축사와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광복절 축사에서도 이 대통령은 독립투쟁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기록하고, 국민과 함께 만들어 갈 것이며 생존 애국지사분들께 각별한 예우를 다하고, 독립유공자 유족의 보상 범위도 더 넓히겠다고 밝혔다. 1년 동안 어떤 성과나 눈에 띄는 정책 변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기념식과 기념행사를 크게 하고, 독립운동 기념시설을 새로 조성한다고 독립운동의 가치가 자연스럽게 우리의 일상에 뿌리내리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해외 독립운동사적지를 조사하며, 미서훈 독립운동가에 대해 발굴하고, 잘못된 역사의 유산을 바로잡으려면 독립운동사 연구역량이 뒷받침돼야 한다.
2015년 광복 70주년을 계기로 개봉된 영화 '암살'과 '밀정'을 비롯해 '봉오동전투', '하얼빈' 등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가 잇달아 제작돼 큰 호응을 얻었고,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도 많이 제작됐다. 그러나 정작 독립운동사의 대중화에 기초가 되는 학계의 연구생태계는 급격히 붕괴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독립운동사 연구의 고사(枯死)를 걱정하는 상황이다.
2세대 독립운동사연구가들 사이에서는 "이젠 대학에서 독립운동사를 배울 환경도 안 되고 가르칠 사람도 없다"는 한탄이 나오고 있다. 1980년대에 대학에서 독립운동사 연구를 시작해 강단에 섰던 2세대 독립운동연구가들은 향후 5년 안에 모두 은퇴하게 된다. 대학은 이런저런 이유로 후임 교수를 뽑지 않고 있다. 대학에 개설돼 있던 독립운동사 강좌도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대학원에서 독립운동사를 전공하는 후속세대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독립운동사의 외연을 넓히고, 북한의 '혁명역사'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위해 필요한 사회주의운동사 연구자는 말할 필요조차도 없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에 지금까지 독립운동 전공 교수가 없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상징적인 일이다.
1987년 국내 유일의 독립운동사 연구기관으로 개소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도 40여 년 동안 적지 않은 역할을 수행해 왔지만, 독립운동사 연구자를 양성하고 연구하는 기능은 약화했다.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은 더 늦기 전에 기관별로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사 자료를 모아 전체 자료집을 만들고, 후속세대 연구자들을 위해 중국, 미국, 일본 등 각국에서 수집된 1차 자료의 번역작업이 이뤄져야 하며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사 연구 인력과 연구 역량도 키워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독립기념관은 올해 업무보고에서 "분산된 독립운동사 자료의 통합적 접근 경로 제공하고, 디지털 기반의 공공역사 플랫폼으로 독립기념관의 기능을 강화하겠다"라는 구상을 밝혔다. 또한 중장기적 과제로 AI, 빅데이터를 도입한 정보시스템 구축으로 사용자 눈높이 맞는 통합형·맞춤형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업무방향은 제대로 설정됐다. 그러나 정작 자료 수집과 정리 공개 관련 예산은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AI, 빅데이터를 도입한 정보시스템 구축 예산도 내년에 반영될지 불투명하다.
독립운동사는 단순히 지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담론을 산출하는 저수지 역할을 한다. 독립운동사 연구는 국가의 정체성과도 연결된다. 고사하고 있는 독립운동사 연구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독립기념관과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역할과 기능을 높이는 것 외에 뚜렷한 현실적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예산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일회성 행사비가 아니라 전문 인력 채용과 체계적 자료 구축에 더 많은 투자를 하자는 것이다.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 대통령은 신뢰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경축사가 빈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독립기념관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과감한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국가보훈부에 종속된 독립기념관의 위상과 역할도 독립적으로 강화돼야 한다. 북한 조선혁명박물관의 독립운동사에 대한 왜곡, 전시자료의 정치적 편향성을 비판하기에 앞서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독립기념관이 정치적 논란과 역사관논쟁의 굴레에서 벗어나 시민교양, 전문 연구, 1차 자료 제공 등 독립운동사의 중심기관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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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북한 정치·군사·사회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함께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등 북한 수뇌부에 대한 '리더십 해석'을 통해 반 발짝 앞서 북한의 변화를 읽어낸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은 서울대 대학원(국사학과)을 마치고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 전문기자를 거쳐 국민대·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국가기록원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